박재민 교수가 이미지와 데이터 시대에 조경의 정체성을 다시 묻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조경은 더 이상 흙과 나무만으로 지어지지 않는다.
바람이 스치는 자리와 인간의 기억이 겹쳐지고, 현실의 숲 위로 또 하나의 디지털 숲이 포개진다. 우리가 바라보던 경관은 이제 두 겹의 세계로 흔들린다.
박재민 교수(청주대 조경학과)는 이 겹쳐진 세계의 문을 열어 보이며 묻는다.
“조경은 무엇을 지켜내고, 무엇을 새로 창조해야 하는가.”
데이터와 이미지, 기술과 감정이 뒤섞인 풍경 속에서 조경가는 더 이상 도면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세계의 의미를 번역해내는 해석자가 되어야 한다.
4일 서울 상일동 (주)한국종합기술 강의실에서 열린 한종 조경레저부 창립 40주년 기념 마지막 5주차 강의에서 박 교수는 조경의 본질인 ‘경관’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AI·BIM·탄소·혼성현실(Hyper Reality)의 융합이 불러올 새로운 시대의 조경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박 교수는 경관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이가 해석하는 문화적 이미지까지 포함된다고 말했다.
“경관은 보이는 이미지가 아니라, 해석되는 이미지다”
박 교수는 먼저 자신을 “경관 연구자”라고 소개하며 강의를 열었다. 경관은 단순히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주체가 해석하는 문화적 이미지까지 포함한다고 강조했다.
“보이지 않는 이미지까지 설계하는 것이 조경”이라는 그의 설명은 경관 연구의 출발점을 정교하게 짚는다. 그는 현재 경관론이 자연경관–농지–도시–역사경관을 지나 ‘넥스트 경관’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으며, 조경이 곧 다루게 될 새로운 대상이라고 지적했다.
이 ‘다가오는 경관’은 디지털 기술과 결합하며 전례 없는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박 교수는 물리적 공간 위에 가상 이미지가 겹쳐지는 혼성 현실 경관의 가능성을 자세히 설명했다. 현실 세계와 가상 이미지가 교차하고, 그 위에서 정보·광고·콘텐츠가 흘러다니는 새로운 도시 경험이 자리 잡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 자연보다 더 완벽한 ‘가상나무’가 선호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예시는 청중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박 교수는 물리적 공간 위에 가상 이미지가 겹쳐지는 혼성 현실 경관의 가능성을 유튜브 영상을 통해 보여줬다. 박 교수 제공
“AI는 조경가의 역할을 바꾼다… 그릴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잘하는 사람”
AI 기술이 설계 방식에 가져온 변화는 강의 내내 중요한 주제로 다뤄졌다.
박 교수는 최근 학생들의 작업을 예로 들며 “AI가 마스터플랜을 클릭 한 번으로 바꿔버리는 시대”가 이미 왔다고 전했다. 텍스트 기반 설명만으로 설계 이미지를 생성하고, 대상지 분석까지 자동화되는 도구가 실무에 깊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질문을 잘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면을 제작하는 노동이 AI에 의해 대체되면서, 조경가의 핵심 역량은 ‘무엇을 설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정의하는 능력, 즉 해석과 판단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 변화는 과거 음악 산업의 변화를 비유하면서 더욱 입체적으로 설명됐다. 기술이 전문 교육을 받지 않은 창작자까지 시장에 들어오게 한 것처럼, AI는 조경 분야에서도 새로운 창작자층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이다.
도면을 제작하는 노동이 AI에 의해 쉽게 대체되면서, 조경가의 질문 능력이 도면 제작을 좌우할 수 있다. 왼쪽의 설계안에 조경가의 지시에 따라 단번에 조경이 그려진다. 박 교수 제공
BIM(Building Information Modeling)과 디지털 트윈, “모델링이 아니라 정보가 핵심”
강의 후반부에서 박 교수는 조경 BIM의 본질을 명확히 짚었다. BIM이란 건물 및 건설 프로젝트를 건설생애주기 동안 설계, 건설, 유지 보수 및 관리하는 프로세스다.
그는 “많은 사람이 BIM을 모델링 프로그램으로 착각하지만, 본질은 ‘정보’”라고 강조했다.
모델링 기술은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조경 자원·시설·식재 정보를 일관된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산업 전체가 협력해야 가능한 작업이라는 것이다.
또한 조경 BIM이 디지털 트윈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공공데이터와의 연계가 중요하며, 향후 고사 가능성 예측·하자관리 등 유지관리 체계 전반이 디지털 기반으로 재편될 것이라 전망했다.
서울역 옥상정원 BIM 모델링 & 시뮬레이션. 박 교수 제공
탄소·수목 데이터·블록체인… 조경 산업의 새로운 자산
박 교수는 자신이 진행 중인 탄소 계산·수목 데이터·블록체인 기반 추적 시스템 연구도 소개했다.
그는 탄소 계산을 단순히 수종 변경이나 식재량 조절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며, 설계의 개념과 예산을 유지한 상태에서 탄소를 줄일 수 있는 정교한 수치 계산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수목의 생산–납품–식재–폐기까지의 전 과정을 블록체인으로 추적하는 기술을 개발 중이라 밝히며, “수목 데이터는 조경 산업이 가진 가장 고유하고 강력한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부실 수목의 유통을 막고 품질 관리 체계를 혁신할 수 있는 방식으로 소개됐다.
탄소 계산 역시 묘목 단계부터 폐기물 처리까지 전 생애주기를 고려해야 하며, 단순한 연간 흡수량 계산으로는 정확한 수치가 나올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 내용은 향후 조경 설계와 유지관리 체계가 얼마나 과학화될 것인지를 예고하는 대목이었다.
박 교수는 혼성현실·AI·데이터 기반 도시가 조경의 역할을 다시 규정하게 될 것이라 전망했다.
“기술은 빠르게 바뀌지만, 조경이 해석해야 하는 세계는 더 넓어지고 있다”
박 교수는 마지막으로 “조경은 언제나 자본·기술·사회 변화와 함께 진화해 왔다”고 말했다.
산업화 시대의 공원, 아파트 조경, 산업시설의 재활용 공간 등 시대가 요구한 공간 유형은 계속 바뀌어 왔다고 지적하며, 앞으로도 혼성현실·AI·데이터 기반 도시가 조경의 역할을 다시 규정하게 될 것이라 전망했다.
그는 “지금은 기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만들어내는 세계를 조경의 시선으로 해석해야 하는 시기”라고 말하며 강의를 마무리했다.
변화의 속도는 빠르지만, 조경이 다루는 대상—경관의 의미와 사람의 경험—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조용히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