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예사롭지 않은 제주시 애월읍 구엄리 일주서로 바로 옆, 흰수염고래가 꿈꾸는 자리에 작은 왕국이 있다. 코끼리와 코뿔소, 사슴 모양의 숙소가 아이들을 맞이하고, 로봇 피겨가 부모의 향수를 깨우는 곳. 30개의 객실에서 시작된 10년의 여정은, 매년 재방문하는 가족들의 발자국으로 단단해졌다. 이곳에서 세 살이던 아이는 열 살이 되어 다시 온다. "작년에 이게 없었는데!" 하며 새로운 놀이기구를 발견하는 아이의 눈빛처럼, 이 리조트는 멈추지 않고 변화한다. 제조업에서 시작한 한 남자가 만든, 키즈 리조트의 선구자. '애월 키즈펜션'으로 더 잘 알려진 흰수염고래리조트 백정훈 대표의 이야기다.(편집자 주)
금속에서 꿈으로, 40대의 도전
제주 애월읍 일주도로변, 흰수염고래리조트의 프론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로비 곳곳에 전시된 로봇 피겨들이다. 아이언맨, 건담, 아톰, 마징가Z... 1980~90년대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는 추억을, 아이들에게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컬렉션이다.
백정훈 대표는 제주 금속 구조물 제조업체 시민공업사의 2세 경영인이다. 제주도 금속 구조물 1호 사업자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기술로 버스 정류소, 어린이 보호구역 시설물, 교량 난간 등 제주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그런 그가 40대 중반, 전혀 다른 도전을 시작했다.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제주도는 중국인 관광객으로 붐볐고, 종합건설업이나 건자재 납품, 숙박업 등 여러 사업을 고민했죠. 현재 이 땅을 보는 순간 숙박업이 답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숙박업소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똑같이 하면 저는 남들의 10%밖에 따라갈 수 없는 구조였어요. 경쟁력이 필요했죠." 그가 찾은 해답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분야, 바로 어린이 놀이시설이었다.
백정훈 대표와 어반톡 이형철 대표(오른쪽)가 동물모양 숙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제주 최초, 전국 1호 키즈 리조트의 탄생
2015년, 제주에서 키즈 리조트는 생소한 개념이었다. 5성급 호텔이 아닌 이상 어린이를 위한 특별한 시설을 갖춘 곳은 거의 없었다. 컨설팅 업체들은 만류했다. "왜 쓸데없는 시설에 돈을 쓰느냐, 차라리 방을 더 지어라"는 조언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럴 거면 제가 이 사업을 할 이유가 없었어요. 저는 다른 길을 가야 했습니다."
박람회에서 우연히 본 동물 모양의 숙박 시설이 영감을 줬다. 제작업체와 협의 끝에 코끼리, 코뿔소, 기린 등의 형태를 한 객실을 전국 최초로 설치했다. 공중파 방송국이 취재를 나올 만큼 화제가 됐다.
처음 두 달은 고전했다. 인지도가 없으니 입실률이 떨어졌다. 하지만 3개월째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입실률이 70%를 넘어섰고, 이후 2~3년간 이 수치를 유지했다. 당시 업계 평균 입실률이 50%였던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성과였다.
"관광협회 자료를 보니 제주에서 70~80% 가동률을 기록하는 곳이 신라호텔, 롯데호텔, 그리고 저희뿐이었습니다. 물론 대형 호텔은 식음료 매출이 크지만, 저희는 순수하게 숙박과 키즈 시설만으로 그 수치를 만들어냈죠."
1층 로비에는 성인 취향의 다양한 피겨가 전시돼 있다. 백 대표의 개인 취향이기도 하다.
4년, 5년, 6년... 함께 자라는 고객들
흰수염고래리조트의 가장 큰 자산은 '진성 고객'이다. 한 번 다녀간 가족이 매년, 때로는 일 년에 여러 번 찾아온다. 아이가 3살 때 처음 와서 10살이 될 때까지 매년 오는 가족도 있다. 제주 국제학교 학부모들은 5~7년째 단골이다.
"고객들이 오시면 '올해는 이게 바뀌었네요' 하고 말씀하세요. 저희가 매년 시설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다는 걸 아시는 거죠. 프론트에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전시하는데, 작년에 그린 그림에서 자기 이름을 찾는 아이들도 있어요."
주중 낮시간에는 근처 유치원 어린이들의 단골 체험학습 장소다.
재방문 고객 관리는 체계적이다. 3년 이상 방문한 고객은 VIP로 분류해 차 서비스나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영업을 따로 하지 않아도 이들의 입소문과 온라인 리뷰가 최고의 마케팅이 된다.
숙박 외에도 수입원을 다각화했다. 퇴실 시간인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 사이, 지역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외부활동 시간으로 이곳을 찾는다. "오늘도 20명 정도 다녀갔어요. 기차 체험, 페달 보트, 전동카, 모래 놀이터 등에서 1~2시간 놀다 가죠. 있는 시설을 활용하는 것이니 서로 윈윈입니다."
로비에는 다녀간 어린이 고객들의 고래 그림이 연중 전시돼 있다.
다음은 백 대표와의 일문일답이다.
Q. 제주도 숙박업계가 전반적으로 어려운 상황입니다. 체감하시는 변화가 있나요?
"솔직히 힘들죠. 2~3년 사이에 관광객이 제주 대신 해외로 빠져나가는 추세가 뚜렷합니다. 숙박업체도 너무 많아졌고요. 하지만 저희는 가격 경쟁보다는 기존 고객 관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재방문율이 70%가 넘으니까요."
Q. 30개 객실이면 규모가 작은 편인데, 운영에 어려움은 없나요?
"업계에서는 최소 50개 객실은 돼야 운영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객실 단가가 달라요. 예전에는 저희 가격을 보고 다른 업체들이 가격을 올렸을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경쟁이 치열해져서 가격을 많이 내렸지만, 그래도 재방문 고객들 덕분에 버티고 있습니다."
백 대표(왼쪽)가 어반톡 이형철 대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Q. 성수기와 비수기 차이가 크겠네요.
"숙박업은 6~8월 석 달로 1년 농사를 짓는다고 합니다. 수영장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의 매출 차이가 상당히 크죠. 하지만 저희는 비수기에도 페달 보트, 기차, 전동카 등으로 아이들이 즐길 거리를 제공하려고 노력합니다."
Q. 직원은 몇 명이나 되나요?
"제일 많을 때가 12명이었고 지금은 7명 정도입니다. 성수기에는 인력을 늘리고 비수기에는 조정하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Q. 시설 안전관리는 어떻게 하시나요?
"놀이시설 보험에 가입해야 하고, 시청에서 매년 안전검사를 나옵니다. 안전성 검사를 받고, 문제가 있으면 시정 조치를 하죠. 문제가 생기면 영업을 못 하니까 가장 신경 쓰는 부분입니다. 10년간 안전사고 없이 운영해온 것이 저희의 자랑입니다."
리조트 로비에는 학부모 고객의 감성을 고려한 다양한 피겨와 함께 옛날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고 있다.
Q. 로비의 로봇 피겨 컬렉션이 인상적입니다. 특별한 의도가 있나요?
"부모님도 즐기고 아이들도 좋아하는 컨셉으로 잡았습니다. 각 층 로비마다 다양한 피겨를 전시했어요. 아이들은 어리니까 부모님들이 젊잖아요. 30~40대 부모님들의 어린 시절과 연결되는 콘텐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백 대표는 1층 로비의 아이언맨은 1,800만 원을 들여 홍콩에서 수입했다고 귀띔했다.)
슬램덩크, 드래곤볼 같은 만화책도 비치하고, TV에서는 아톰 같은 옛날 만화를 틀어놓습니다. 아이들은 잘 모르지만 부모님들은 "아, 내가 어릴 때 봤던 건데!" 하시면서 좋아하세요. 아빠 엄마의 감성을 건드리는 거죠."
수영장 옆에는 아이언맨의 슈트인 거대한 '헐크버스터'가 서 있다.
Q. 매년 시설을 업그레이드한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가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시설들을 계속 바꿉니다. 없던 게 생기기도 하고, 있던 것을 더 좋게 고치기도 하죠. 저희가 원래 금속 구조물, 조경 시설물을 제작하는 회사라서 직접 만들고 설치할 수 있습니다.
4~5년 단골 고객들은 "올해는 이게 바뀌었네요" 하고 알아차리세요. 저희가 계속 뭔가를 하고 있다는 걸 고객들이 느끼는 거죠. 심지어 "내년에는 또 뭐 바꿀 거예요?" 하고 물어보시기도 합니다."
Q. 온라인 마케팅은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네이버, 여기어때, 야놀자, 트립닷컴, 쿠팡 등 주요 플랫폼에 입점해 있습니다. 초창기에는 어떻게 영업을 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지금은 온라인 플랫폼이 워낙 잘 되어 있어서 고객들이 직접 검색하고 비교해서 선택하세요. 저희가 영업하는 게 아니라 고객들이 저희를 판단하는 시대입니다."
Q. SNS 마케팅도 하시나요?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은 있는데, 저희가 직접 활발하게 운영하지는 않습니다. 손님들이 자발적으로 올려주시는 리뷰가 많아요. 그런 리얼 후기들이 가장 효과적인 마케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앞으로는 좀 더 적극적으로 SNS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을 받고 고민 중입니다."
Q. 10년을 운영하시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 것은 무엇인가요?
"시설 관리입니다. 신규 투자나 확장보다 유지 관리가 훨씬 중요합니다. 고객들이 '여기는 항상 깨끗하다'고 말씀하시는 게 가장 뿌듯합니다. 그리고 합리적인 가격, 이 두 가지가 고객 입장에서 제일 중요한 거죠."
다양한 동물 형태의 숙소는 어린이 고객들이 특히 좋아한다. 미끄럼틀을 통해 2층에서 내려오는 색다른 즐거움이 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펫 동반 객실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요즘 반려동물과 함께 여행하는 가족이 많아졌으니까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기존 시설을 잘 관리하고, 고객들에게 만족을 드리는 겁니다.
스토리텔링도 강화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3살 때부터 매년 와서 사진을 찍은 가족들의 앨범을 만들어드린다든지, 그런 감성적인 마케팅도 해볼 생각입니다. 결국 저희를 찾는 이유는 아이들의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니까요."
Q. 본업인 시설물 제조업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시민공업사와 제주KR은 계속 운영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업계 전반적으로 어려워서 작년 대비 60% 정도 매출이 줄었습니다. 하지만 신규 공사보다는 유지보수 쪽으로 꾸준히 일감이 있어서 버티고 있습니다. 버스 정류소, 교량 난간 같은 시설물들은 지속적으로 관리가 필요하니까요."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다면?
"10년을 돌아보면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걱정도 많이 했고, 컨설팅 업체들의 부정적인 전망도 있었죠. 하지만 저만의 방식으로 꾸준히 해온 것이 결국 답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건 매년 찾아주시는 고객들입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고, '내년에 또 올게요' 하고 가시는 그분들 덕분에 10년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제주 흰수염고래리조트 전경. 동심을 자극하는데다 깨끗해서 재방문율이 매우 높다고 한다.
INFO
제주 흰수염고래리조트
위치: 제주시 애월읍 일주서로 1868 (올레길 16코스 인근)
객실: 30실
부지: 1,800평
주요 시설: 동물 모양 객실, 야외 수영장, 키즈 놀이시설, 페달 보트, 미니 기차, 전동카, 바비큐장
특징: 전국 최초 동물 모양 객실 도입, 키즈 특화 리조트
재방문율: 70% 이상
주변 관광지: 곽지해수욕장(차량 10분), 이호해수욕장(차량 10분), 해안도로(차량 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