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영혼을 위로하는 길은 산티아고에만 있다.”
30여 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친 박응렬 전 영산강유역환경청장은 퇴직과 동시에 배낭을 멨다. 그리고 스페인 북서부, 800㎞에 이르는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했다. 34일간의 여정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책을 쓰고, 아내와 함께 다시 걷고, 이제는 ‘산티아고 스쿨’을 열어 200여 명에게 길의 의미와 준비법을 전하는 전도사가 됐다.
그가 전하는 산티아고는 단순한 걷기가 아니다. 몸은 가벼워지고, 마음은 비워지며, 기적 같은 인연과 마주하는 ‘삶의 전환점’이다.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출발해 만나는 피레네 산맥. 박응렬 제공
공직에서 순례길로… ‘두 번째 인생’의 출발
2019년 봄, 박 전 청장은 프랑스 생장피에드포르에서 출발해 34일간 915㎞를 걸었다. 매일 수십 킬로미터를 걷는 동안 그는 ‘왜 사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했고, 발걸음마다 삶의 무게를 덜어냈다.
길 위에서 얻은 깨달음은 그를 움직이게 했다. 2023년, 그는 경험을 담은 책 [그래서, 산티아고]를 출간했고, 책을 읽은 아내와 함께 두 번째 순례길에 올랐다. 같은 해, 더 많은 이들에게 길의 매력을 전하고자 ‘산티아고 스쿨’을 개설했다. 광주와 부천에서 열리는 강좌에는 지금까지 200여 명이 참여했다.
“순례길에서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온전히 나 자신을 마주할 용기와, 해냈다는 성취감을 얻게 되죠.”
프랑스길 800km에서 가장 높은 철의 십자가.
순례자들이 고향에서 가져온 돌을 놓고 소원을 비는 곳으로 가장 눈물을 많이 흘리는 곳이기도 하다. 박응렬 제공
걷는 즐거움과 얻는 성과
그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주는 선물을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몸과 마음의 해방이다. 도심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 속을 걸으면 욕심이 줄고, 불필요한 짐이 내려간다.
둘째, 자기 발견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길에서 포기와 도전이 교차하지만, 발걸음을 이어갈 때 스스로의 한계를 새롭게 쓴다.
셋째, 만남의 기적이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순례자들과의 짧지만 진한 인연이 길 위에 피어난다.
넷째, 회복과 위로다. 직장, 학업, 인간관계에 지친 이들이 길 위에서 마음을 회복한다.
다섯째, 성취감과 자신감이다.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섰을 때의 성취감은 이후 일상의 어려움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
용서의 언덕에는 철제 순례자상이 순례자를 반간다.
해발 790m 고지대에 바람이 강해 오래 머무를 수 없다. 박응렬 제공
왜 사람들은 산티아고를 걷는가
한국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2019년 tvN 예능 스페인 하숙 방영 이후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2024년 전 세계 순례길 완주자는 49만 9,242명, 이 가운데 한국인은 7,910명으로 세계 10위다. 특히 프랑스길은 숙소와 식당 등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고 비용이 저렴해 가장 인기다. 한국인들이 산티아고를 찾는 이유는 다양하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해파랑길 등 국내 걷기 문화가 해외로 확산
▷혼자 걷는 시간 속에서 인생을 재정비하는 기회
▷퇴직 후 새로운 목표 설정, 인생 전환기 도전 욕구
▷천년의 건축물과 유적이 주는 문화적 울림
박 전 청장은 청년층에게도 순례길을 권한다. 취업 준비생, 재수생, 이직 준비자 등에게 길은 자신감과 강한 의지를 심어준다.
순례길에서 참가자가 이정표를 보고 있다. 박응렬 제공
강의에서 길로, 길에서 다시 강의로
산티아고 스쿨 강의장에는 3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모인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걷기 위해 찾아오거나, 퇴직 후 새 목표를 세운 이들도 있다. 강의 후에는 전화번호를 교환하며 ‘길벗’이 되는 풍경이 자연스럽다.
많은 수강생들이 이렇게 말한다.
“갈까 말까 망설였는데 강의를 듣고 가야겠다는 확신이 섰습니다.”
“막막했던 준비 과정이 구체적으로 그려졌습니다.”
안갯속을 걷고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참가자들. 박응렬 제공
앞으로의 길
박 전 청장은 매년 봄, 가을에 광주 가톨릭대와 부천 가톨릭대 평생 교육원에서 '산티아고 스쿨'을 운영한다. 올해 가을 주중 강좌는 9월9일부터 30일까지, 주말 강좌는 10월11일부터 18일까지 열 계획이다. 5월과 10월에는 직접 가이드로 길에 나서기도 한다.
그의 목표는 단순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길 위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찾는 것. 공직에서 환경을 지키던 그는, 이제 사람들의 ‘마음의 환경’을 가꾸는 길 위에 서 있다.
산티아고 대성당.
800km 대장정의 종착지,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야고보 성인 흉상과 포옹하며 순례를 마무리 한다. 박응렬 제공
“까미노와의 인연은 숙명입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기적 같은 인연과 감사, 나를 사랑하는 시간을 경험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