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도 피톤치드 풍성한 붓순나무·황칠나무·생달나무. 산림청 제공

붓순나무, 황칠나무, 생달나무.

이름만 들어서는 낯선 이 나무들이 전라남도 숲에서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

겨울에도 잎을 떨구지 않고 푸른 자태를 유지하며, 우리 몸에 이로운 피톤치드를 끊임없이 발산하는 것이다.

전남도산림연구원이 2023년부터 2025년까지 2년간 이 세 나무를 집중 관찰한 결과, 한겨울에도 여름의 3분의 1 수준으로 항균·항염·항알레르기 물질을 쏟아낸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겨울 숲은 쉰다"는 상식을 뒤집는 발견이다.

전남 숲의 숨은 주역들

난대숲 피톤치드 발산 추이 연구. 전라남도 산림연구원 제공

황칠나무는 전남을 대표하는 난대수종이다. 줄기에서 채취한 황칠은 예로부터 최고급 도료로 쓰였고, 약재로도 활용됐다. 잎은 일년 내내 광택이 나는 진한 녹색을 띤다.

생달나무는 남쪽 해안가에서 자라는 상록활엽수로, 잎을 비비면 계피 같은 향이 난다. 나무 전체에서 방향 성분이 나와 예로부터 방향제나 향료로 사용됐다.

붓순나무는 이름처럼 새순이 붓처럼 생긴 나무다. 키가 10m 이상 자라며, 두꺼운 잎이 사철 푸르다. 세 나무 중 가장 많은 피톤치드를 발산하는 것으로 이번 연구에서 밝혀졌다.

이 세 나무의 공통점은 '상록활엽수'라는 것이다. 겨울에도 잎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서울 근교 산의 참나무나 단풍나무가 가을이면 낙엽을 떨구고 휴면에 들어가는 것과 대조적이다. 사철 푸른 잎을 달고 있으니 사계절 내내 피톤치드를 만들어낼 수 있다.

나무한테 비닐봉지를 씌워 알아낸 비밀

테들러백 활용, 나무가 발산하는 공기를 포집하고 있다. 전라남도 산림연구원 제공

연구팀은 독특한 방법으로 피톤치드를 측정했다. '테들러백'이라는 특수 비닐봉지를 나뭇가지와 잎에 직접 씌워 나무가 내뿜는 공기를 포집했다. 마치 나무에게 "숨 한 번 불어보세요" 하고 부탁하는 것처럼. 이 방법은 기존의 간접 측정 방식보다 정확도가 훨씬 높다.

매월 현장에서 이렇게 모은 공기를 정밀 분석 장비(ATD/GC-MS)로 들여다봤더니 32종의 피톤치드 성분이 검출됐다.

분석 결과는 놀라웠다. 세 나무 모두 여름철(460ng)에 가장 많은 피톤치드를 발산했지만, 겨울철에도 154.3ng을 기록했다. 봄(164.7ng), 가을(190.8ng)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는 수치다. 나노그램(ng)은 10억분의 1g을 뜻하는 극미량 단위지만, 피톤치드는 이 정도 양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낸다.

겨울 숲의 숨은 에이스, 붓순나무

붓순나무. 국립수목원 제공

수종별로 살펴보니 각자의 개성이 뚜렷했다. 생달나무는 봄(197.6ng)과 가을(236.1ng)에 활발했다. 황칠나무는 계절별로 비교적 고른 발산량을 보였다.

하지만 단연 돋보인 건 붓순나무였다. 여름철에는 660.8ng으로 다른 나무보다 1.5~2.2배 많은 피톤치드를 발산했고, 겨울철에는 247.9ng으로 무려 2.3배나 많았다. 사계절 내내 일당백의 활약을 보인 셈이다.

특히 겨울철 발산량이 압도적이라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다른 나무들이 활동을 줄이는 시기에 붓순나무는 오히려 더 열심히 일했다. 겨울철 산림욕을 계획한다면 붓순나무 주변이 '핫플레이스'인 이유다.

코로 마시는 천연 건강 성분

겨울 숲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는 등산객. AI 생성 이미지

그렇다면 이 나무들이 발산하는 피톤치드가 우리 몸에 어떤 영향을 줄까? 연구팀이 분석한 주요 성분을 보면 답이 나온다.

알파피넨·베타피넨: 스트레스를 줄이고 면역력을 높여준다. 산에 오르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이유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감소시키고 자율신경을 안정시킨다.

리나롤: 항균·항염 효과가 있다. 몸속 염증과 싸우는 천연 소방수 역할을 한다. 피부질환 개선에도 도움을 준다.

발렌센: 알레르기를 억제한다. 봄철 꽃가루 알레르기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반가운 성분이다.

이런 성분들이 황칠나무, 생달나무, 붓순나무에서 겨울에도 꾸준히 발산된다. 세 나무가 만드는 전남 난대림은 사실상 365일 운영되는 '천연 치유센터'인 셈이다. 입장료도 없고, 예약도 필요 없다.

전남이 가진 녹색 보물창고

완도수목원 전경. 산림청 제공

이 세 나무를 포함한 난대수종들이 전남에 집중돼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전남은 전국 난대림 면적의 62%가 모여 있는 보물창고다. 전국 난대림 총 1만 6,421헥타르 중 1만 102헥타르(약 3,054만 평)가 전남에 분포한다.

완도수목원을 중심으로 황칠나무, 붉가시나무, 동백나무, 생달나무가 대규모로 자생한다. 이 숲은 탄소를 흡수하는 능력도 뛰어나 기후변화 대응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후변화로 이런 난대림이 점점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과거에는 제주도와 남해안 일부에서만 볼 수 있었던 황칠나무, 생달나무, 붓순나무 같은 나무들이 이제는 더 북쪽에서도 자란다. 전남의 난대림은 미래 한국 숲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타임머신 같은 곳이다.

1월에도 숲으로 나가야 할 이유

오득실 전라남도 산림연구원장

오득실 전남도산림연구원장은 "황칠나무, 생달나무, 붓순나무 같은 난대 상록활엽수가 겨울에도 풍부한 피톤치드를 발산한다는 점에서 산림치유와 생태관광 자원으로서의 활용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연구 결과는 겨울철 숲길 산책이나 힐링 프로그램 개발에 과학적 근거를 제공한다. 지금까지 산림욕이나 치유 프로그램은 주로 봄부터 가을까지 집중됐다. "겨울 숲은 볼 게 없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칠나무, 생달나무, 붓순나무가 지키는 전남 난대림에서는 한겨울에도 숲이 살아 숨 쉬며 건강 물질을 내뿜는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푸른 잎을 단 나무들 사이를 걷는 것만으로도 치유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산림욕 30분이면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미세먼지도 잡는 일석이조

메타세콰이어길. 전라남도 산림연구원 제공

연구원은 세 나무의 피톤치드 연구와 함께 도시숲의 미세먼지 저감 효과도 연구 중이다. 녹지띠, 공원, 주거지 등 6개 고정 구역을 대상으로 실시간 미세먼지 모니터링을 실시하며, 산림의 공기질 개선 효과를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다각적 연구는 산림이 제공하는 생태계서비스를 정량화하고, 도시계획과 산림정책에 과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미세먼지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상황에서, 황칠나무·생달나무·붓순나무 같은 난대수종의 공기정화 기능과 피톤치드 발산 효과를 결합한 연구는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한 정책 수립에 중요한 기초자료가 될 것이다.

앞으로의 과제

물론 숙제도 남아 있다. 이번 연구는 3종의 나무를 2년간 관찰한 결과다. 황칠나무, 생달나무, 붓순나무 외에 다른 난대수종들도 유사한 패턴을 보이는지, 더 많은 나무를 대상으로 장기간 연구가 필요하다.

피톤치드 발산량과 실제 건강 효과 사이의 관계도 더 연구해야 한다. "붓순나무 주변에서 30분 걸으면 스트레스가 얼마나 줄어든다"는 식의 구체적인 수치가 나와야 실용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기후변화로 인해 난대림의 분포 범위가 변화하고 있는 만큼,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산림 생태계 변화를 추적하고 적응 전략을 수립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겨울 숲에서 만나는 세 친구

전라남도 산림연구원 전경. 전라남도 산림연구원 제공

붓순나무, 황칠나무, 생달나무. 이제 이 이름들이 조금은 친근하게 느껴지는가? 이 세 나무가 전남의 겨울 숲을 지키며 우리에게 건강을 선물하고 있다.

오는 주말, 따뜻하게 입고 전남의 난대림을 찾아가보는 건 어떨까? 낙엽 대신 푸른 잎이 맞아주는 숲에서, 붓순나무·황칠나무·생달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를 마시며 피로를 씻어내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전남까지 가지 않아도 괜찮다. 집 근처 공원이나 가로수길의 상록수 주변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만 사계절 내내 풍부한 피톤치드를 느끼고 싶다면, 황칠나무·생달나무·붓순나무가 자라는 전남의 난대림을 찾는 것이 가장 좋다.

과학이 증명한 겨울 숲의 힘. 세 나무가 들려주는 건강 이야기를 직접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