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선 ‘이스턴 비너스’크루즈선 ‘이스턴 비너스’

첫째 날 — 폭염 끝 피서 시작

서울에서는 폭염이 한창이던 날, 부산역에 도착하자마자 소나기가 잠시 내렸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공기를 가라앉히고, 마치 ‘이제 청량한 여행이 시작된다’고 알려주는 신호 같았다.

부산항 여객선 터미널에서 저녁 6시, 크루즈선 ‘이스턴 비너스’가 부드럽게 바다로 나아갔다. 승선 후 가장 먼저 안내받은 곳은 ‘소샬리토’라는 이름의 대식당. 고급 사교장 분위기에서 뷔페 성찬의 저녁이 기다리고 있었다. 크루즈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호화로운 저녁차림이다. 셰프와 크루들의 친절하고 극진한 서비스로 이 세상 최고의 대접을 받는 여행객의 기분에 빠져든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 뷔페가 길게 펼쳐져 있었다. 선홍빛 로스트비프, 해산물, 각국의 요리가 대리석 테이블 위에 빛났다. 직원들의 미소와 세심한 서비스는 여행객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았다.

‘소샬리토’라는 이름의 대식당


멀미약을 미리 챙긴 덕분일까, 파도의 움직임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저녁을 즐겼다. 육지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자, 나는 완전히 ‘크루즈 모드’로 진입했다. 바다 위의 첫날밤은 잔잔한 흰 물결과 조용한 선실 속에서 그렇게 흘러갔다.

조용한 선실

수영장

깔끔한 객실

수영장


둘째 날 — 수전사에서 길을 잃다

아침 8시, 배는 일본 규슈 야츠시로 항에 닿았다. 부두에서는 쿠마모토의 마스코트 ‘쿠마몬’과 곰 발바닥 장갑을 낀 어르신들이 환하게 웃으며 귀여운 포즈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침 메뉴는 전복죽. 긴 바닷길을 건너온 위장을 다독이는, 그야말로 ‘속 편한 호사’였다.

쿠마모토의 마스코트 ‘쿠마몬’

쿠마몬


쿠마모토에서는 기항지 패키지 투어를 하기로 했다. 크루즈에서부터 동행한 여성 가이드가 사전 미팅장에서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서른 명 남짓한 일행이 리무진 버스에 올랐다. 이날 일정은 스이젠지 투어. 대학에서 일어일문학을 공부했다는 그녀는 일본에 대한 문화. 역사. 지리. 경제. 인문 지식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해박한 지식과 열정적인 자세로 일본에 대한 모든 것을 전해주려고 애썼다. 부산 특유의 정겨운 말씨로 끊임없이 버스 안을 대화와 호응의 온기로 가득 채웠다. 내가 재직했던 대학 출신이라 그런지 더 친근한 느낌.

스이젠지 정원(水前寺 成趣園)은 한눈에 보아도 완벽하게 다듬어진 풍경화 같았다. 낮게 깎인 잔디 언덕과 부드럽게 굽이치는 연못, 그 뒤로 보이는 인공 후지산이 마치 사무라이의 자존심을 조용히 숨기고 있는 듯했다.

스이젠지 정원(水前寺 成趣園)

스이젠지 정원은 완벽하게 다듬어진 풍경화 같았다


가이드에게 배운 지식을 총동원해서 스이젠지를 소개해 본다. 이 땅의 첫 주인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는 돌 하나, 흙 한 줌에도 무사의 기개를 새겨 넣던 사람이었다. 그는 성을 쌓고 번을 다스리며, 쿠마모토를 서일본의 보석처럼 빛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치의 파도는 검보다 날카로웠다. 기요마사의 죽음 이후, 그의 가문은 한순간에 권력을 잃고 성문 밖으로 밀려났다.

그 빈자리를 호소가와 히데타다를 맹주로 한 사무라이 가문이 채웠다. 새 주인은 칼을 거두고 대신 차향을 들였다. 스이젠지는 전쟁터의 긴장 대신 다도의 고요를 품고, 무사의 정원에서 귀족의 정원으로 변모했다. 그러나 연못 위로 스치는 바람 속에는 여전히 권력의 무상함이 묻어 있었다.

오늘날의 스이젠지는 잔잔히 물결치는 연못과 푸른 잔디로 여행객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 풍경 속에는, 승리와 몰락을 모두 겪은 사무라이 가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정문을 지나자 녹음이 빽빽한 정원과 후지산을 닮은 푸른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잘 다듬어진 녹나무가 길 양옆으로 줄지어 서 있었고, 작은 신사들이 나타날 때마다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카페 평상에 앉아 말차와 당고 케이크를 맛보며, 바쁜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숨을 고르는 ‘휴식 모드’를 만끽했다.

그런데 그 평온이 오래가진 않았다.
집합 시간 10분 전, 나는 발걸음을 잘못 옮겼다. 정문으로 향한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서문을 지나 남문, 동문, 그리고 북문까지 도달해 있었다. 이미 한 번 본 풍경이 반복되자 불안이 밀려왔다. 핸드폰은 선실에 두고 내려와 연락할 길이 없었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흐르고, 심장은 쿵쿵거렸다.

버스를 내린 곳에서의 집합시각에서 십분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마침 지나던 일본인에게 지도를 가리키며 “메인 게이트!”를 외쳤다.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앞장서 이끌었다. 정문 근처에 이르자,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의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며 다리에 힘이 빠졌다. 반 시간도 안 되는 해프닝이었지만, 마치 인생 항로에서 방향타를 잃고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역경은 늘 이렇게 소소하게 찾아온다. 잠깐의 혼돈과 낭패를 지나면, 평온이 다시 찾아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된다. 이 또한 크루즈의 풍경이었다.

점심은 스키야키 정식. 부드러운 소고기와 달걀, 초밥이 어우러진 맛에 시원한 생맥주 한 모금이 더해지니, 그 해프닝조차 맛있게 소화됐다. 오후에는 구마모토성의 천수각을 천천히 둘러보고, 앞마당에서 열린 공연을 즐겼다. 저녁은 갈비탕과 스낵바 맥주 타임, 그리고 ‘아마데우스 홀’에서의 남미 음악. 생맥주와 하이볼에 몸과 마음이 기분 좋게 취해갔다.

구마모토 성

구마모토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