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길 책임과 최혜영 교수가 출품한 '정원이 속삭이다'. 현대건설 제공
정원은 늘 조용히 말을 건네왔다. 삶의 한가운데서 때로는 자연으로, 때로는 예술로, 우리의 일상을 채워왔다. 최근 영국 정원 박람회에서 한국의 작품 ‘정원이 속삭이다(Garden whispers)’가 수상하며, 한국 조경과 정원 문화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 뒤에는 두 사람의 협업이 있었다. 실무와 기업의 영역에서 아파트 조경을 예술로 끌어올린 최연길 현대건설 책임매니저, 그리고 학문과 디자인의 경계를 넘나들며 정원의 철학과 미래를 모색해온 최혜영 성균관대 교수다.
대학(서울대 조경학과) 선후배 사이이기도한 두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한국 조경의 현재와 미래를 함께 조망한다. -편집자 주-
'2025 RHS 웬트워스 우드하우스 플라워쇼'에서 실버길트 메달을 수상한 성균관대학교 최혜영 교수(가운데), 현대건설 최연길 책임(오른쪽)이 현지 시공사 대표 리 누털씨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현대건설 제공
영국 정원 박람회에서의 수상은 단순한 쾌거가 아니었다. 한국 아파트 조경이 더 이상 부속적 장식이 아니라, 삶의 가치를 높이는 핵심 상징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현대건설에서 조경을 이끄는 최연길 책임은 “조경도 아파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상품”이라 말한다. 그의 발언에는 실무자의 치열한 경험과, 예술과 협업을 통해 조경의 새로운 길을 열겠다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세계 무대 첫 도전, 그리고 수상
지난 7월, 현대건설과 최혜영 교수 팀이 함께한 작품 ‘정원이 속삭이다’가 영국 왕립원예협회(RHS) 주최 정원 박람회인 ‘웬트워스 우드하우스 2025’에서 실버 길트(Silver Gilt) 상을 받았다. 이는 영국 특유의, 금상과 은상 사이에 위치한 상으로, '금 도금을 입힌 은상'이라는 권위 있는 상이다. '웬트워스 우드하우스 플라워쇼'는 RHS가 주최하는 행사로 런던 첼시쇼를 포함해 RHS를 대표하는 4대 쇼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첫 출품이었는데 운 좋게 상을 받았습니다.” 최 책임은 겸손하게 말했지만, 그 과정은 치열했다. 영국 RHS 정원 박람회는 전 세계 공모전을 통해 단 5~6개의 작품만을 선정한다. 수백 개 작품이 몰리는 경쟁을 뚫어야 하고, 선정 이후에는 작품 제작 비용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정원 작가는 기업 후원을 받아야만 조성을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현대건설이 기획 단계부터 함께했고, 건설사로서는 최초로 출품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현대적인 느낌의 한국 출품작은 전통적인 영국 시골집 정원 양식과 확실한 차별성을 보였다. 현대건설 제공
영국 무대에서의 긴장과 아쉬움
심사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영국은 ‘정원의 나라’라 불리며, 전통적인 시골집 정원(Cottage Garden) 양식이 깊게 뿌리내려 있다.
“심사위원들은 우리 정원이 왜 이렇게 자연적이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현대미술관 앞 설치작품처럼 모던한 정원을 제안했는데, 그들에게는 다소 낯설었던 거죠. 약간의 시샘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심사위원들은 작품의 강렬한 인상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다른 정원들은 영국 전통 양식을 따랐지만 현대건설-최 교수 팀은 전혀 새로운 시도를 했다. 미술사조를 끌고 온다면 다른 작품들이 고전주의를 따랐다면 한국팀은 모더니즘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임팩트풀(impactful)하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높낮이가 다른 기둥들이 물결치며 바람이 속삭이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현대건설 제공
493개의 기둥, 그 속의 실험
'정원이 속삭이다 작품의 중심에는 493개의 하얀 폴(기둥)이 있었다. 높낮이가 다른 기둥들이 파도처럼 물결치며 바람이 속삭이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수직과 대각선을 정확히 맞춰 세우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작은 흠집도 심사에 영향을 줄 수 있었죠. 그만큼 정밀 시공이 필요했습니다.”
폴 사이에는 독창적인 자재들이 배치됐다. 현대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재활용해 만든 3D 프린팅 의자, 화장품 공병을 부숴 시멘트와 섞은 바닥재 등이 그것이다. 영국인들에게는 생소한 재료였기에 오히려 참신하다는 반응이 많았다고 한다.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한 비정형 의자는 2021년 최 책임이 취득한 특허 기술이 그대로 반영했다.
현대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재활용해 만든 3D 프린팅 의자, 화장품 공병을 부숴 시멘트와 섞은 바닥재는 심사위원들로부터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대건설 제공
아파트 조경, 상품으로서의 가치
최 책임은 조경을 단순한 녹지나 장식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고객들이 매일 집 앞에서 즐길 수 있는 조경 작품을 제공하는 것, 그것이 조경가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에게 있어 조경이란 "아파트의 가치를 높이는 상품"이라고 단언한다.
현대건설은 프리미엄 주거 브랜드 ‘디에이치’를 통해 예술적 감각을 더한 조경을 선보이고 있다.
“과거처럼 큰 나무와 비싼 시설을 들인 조경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예술성을 더해 아파트의 정체성을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최 책임은 그간 조경과 예술을 결합하는 실험을 꾸준히 이어왔다. 서울 국제조각페스타와 협업해 아파트 단지에 조각품을 설치했고, BBC 애니메이션 ‘바다 탐험대 옥토넛’ 캐릭터를 활용한 어린이 놀이터도 만들었다.
노트북에 출품작 '정원이 속삭이다'를 올려놓고 작품배경을 설명하는 최연길 책임.
“아이들이 집 안에서 보던 캐릭터를 단지 놀이터에서 직접 만난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또 앤서니 브라운의 동화를 모티브로 한 놀이터, 국내 최초 3D 프린팅 놀이터도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아이들이 뛰노는 공간을 새로운 기술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던 놀이터였다.
기업 안에서의 조경
물론 건설사에서 조경 분야의 비중은 크지 않다. 아파트 단지 건설비의 2.5% 내외다.
“매출 규모로 보면 원자력이나 토목 사업에 비할 수 없죠. 하지만 아파트의 마지막 인상을 결정짓는 건 조경입니다. 그래서 회사 내부 고객들에게도 ‘조경의 힘’을 설득해야 했죠.”
그는 이번 수상이 회사 이미지에 긍정적 효과를 주었다고 자부한다. 프리미엄 아파트라면 이런 예술적 조경이 필수가 되는 세상이 됐다고 강조한다.
최 책임은 또한 최근 확 달라진 한국 정원 문화의 흐름에 주목한다. 지자체별로 개최하고 있는 정원 박람회와 국가 정원 사업으로 국민적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현상을 놓치지 않는다.
인공과 자연의 절묘한 조합으로 탄생한 '정원이 속삭이다'는 국내 아파트 단지에 재현된다. 현대건설 제공
“우리나라에는 사실 전통적인 개인 정원의 문화가 약했습니다. 대신 공동주택 조경이 한국형 정원의 역할을 해왔죠. 최근 정원 박람회와 국가정원 사업으로 관심이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이제는 그 관심을 문화로 뿌리내리게 해야 합니다.”
앞으로의 계획
현대건설은 이번에 선보인 ‘정원이 속삭이다’를 서울 방배동 디에이치 단지에 재현할 예정이다. 세계적인 정원 작품을 집 앞에서 누릴 수 있다는 건 고객들에게 큰 가치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는 앞으로도 최혜영 교수 외 다양한 예술가와 협업해 새로운 조경 상품을 개발할 계획이다.
“조경은 단순한 부속이 아니라, 아파트의 문화적 정체성을 만드는 힘입니다. 현대건설이 예술적 감각과 협업을 통해 조경의 새 가치를 보여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