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과 가을 바람. 정익송 제공


가을 바람

정익송

창가에 스미는

시원하고 투명한 손길

뜨겁던 숨결을 거두어가네

발갛게 물든 잎

나지막이 흔들며 노래하고

덧없는 시간을 실어 나르네

잊었던 기억

문득 불러내어 맴돌게 하고

고독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네

어디선가 불어와

가지 끝을 맴도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

차가운 듯 포근히

마음 깊은 곳을 쓸어안고

계절의 문을 조용히 닫아주네

무주 구천동 인월담의 가을. 촬영 손요한

[창작 노트]

정익송

월간『시사문단』시로 등단, 한국시사문단작가협회 회원, 빈여백 동인, 경상남도문인협회 회원, 창원문인협회 회원, 창원특례시 푸른도시사업소 공원녹지과 녹지조성팀장, 풀잎문학상, 북한강문학제 신인상, 국무조정실장상, 서울특별시장상 등 31회 수상

♣ '가을 바람'에 실어 보낸 계절의 변화와 내면의 울림

이 시는 '가을 바람'이라는 제목처럼 자연의 계절적 변화를 통해 시인의 섬세한 감정선과 내면의 깊은 성찰을 밀도 있게 그려내며 독자에게 깊은 공감과 사유의 기회를 선사합니다. 가을 바람의 촉각적,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시인은 시원함과 쓸쓸함, 고독과 위로가 공존하는 복합적인 정서를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 계절의 전환, 그리고 위로의 손길 시의 시작은 "창가에 스미는 시원하고 투명한 손길"이라는 구절에서 가을 바람의 특징을 명징하게 보여줍니다. 무더웠던 여름의 "뜨겁던 숨결을 거두어가는" 가을 바람은 단순한 기온의 하강을 넘어, 쉼과 정화를 가져다주는 치유의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이는 외부 환경의 변화가 곧 내면의 이완과 연결됨을 암시하며, 계절의 전환이 주는 포근한 위로를 느끼게 합니다.

2. 세월의 흔적과 고독의 미학 "발갛게 물든 잎 나지막이 흔들며 노래하고 덧없는 시간을 실어 나르네"라는 구절은 가을 풍경의 아름다움 속에서 시간이 덧없이 흘러감을 시각적, 청각적으로 형상화합니다. 특히 "덧없는 시간을 실어 나르네"라는 표현에서 자연의 순환 속에서 삶의 유한함을 발견하는 시인의 깊은 통찰이 엿보입니다. 이어 "잊었던 기억 문득 불러내어 맴돌게 하고 고독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네"에서는 가을 바람이 단순한 자연 현상을 넘어,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고 고독이라는 감성과 마주하게 하는 매개체가 됨을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이는 고독을 단순한 외로움이 아닌, 자기 성찰의 시간으로 승화시키는 시인의 시선을 보여줍니다.

3. 보이지 않는 존재의 위로와 수용 "어디선가 불어와 가지 끝을 맴도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라는 표현은 가을 바람을 의인화하여,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삶 곳곳에 스며들어 영향을 미치는 존재에 대한 은유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차가운 듯 포근히 마음 깊은 곳을 쓸어안고 계절의 문을 조용히 닫아주네"라고 노래합니다. 이는 가을 바람이 지닌 양면적인 속성, 즉 서늘함 속에 따뜻한 위로를 담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삶의 한 페이지, 혹은 한 계절이 저물어가는 과정을 '조용히 문을 닫아주는' 행위로 묘사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이별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담담한 수용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감원도 함백산의 일출. 촬영 김동선


'가을 바람'은 계절의 변화를 통해 자연의 섭리와 인간 삶의 순환을 아름답게 그려내고자 노력했습니다. 고독과 성찰, 그리고 보이지 않는 위로를 서정적이고 섬세한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깊어가는 가을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다가올 계절을 겸허히 받아들일 용기를 안겨주려는 '가을로의 초대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