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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보문단지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경주 보문관광단지는 신라 천년 고도의 문화유산을 토양 삼아 성장한 한국 관광산업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1970년대 시작된 한국형 국제관광지 조성 프로젝트

15일 경상북도, 경주시 등에 따르면 1970년대 초 정부는 경주를 역사와 자연, 레저가 어우러진 한국형 국제관광지로 육성하기 위해 보문단지 조성을 핵심으로 하는 대규모 관광개발에 착수했다.

당시 경주는 석굴암, 불국사, 첨성대 등 세계적 수준의 문화유산을 다수 보유했지만, 관광객이 머물며 즐길 수 있는 체류형 관광 인프라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는 '보문호'를 중심으로 호텔, 골프장, 유원지, 국제회의장 등을 단계적으로 조성하는 종합개발 계획을 수립했다. 보문호는 원래 경주 중심부에서 6.5km 떨어진 형산강 지류에 위치한 농업용 저수지였다. 관광개발 과정에서 수면을 확장하고 주변 도로와 경관을 정비하면서 오늘날의 아름다운 풍광이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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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보문호 호텔과 리조트

수학여행 명소에서 컨벤션 중심지로 진화

1980년대 들어 보문단지는 특급호텔과 리조트, 콘도미니엄 등이 잇따라 개관하며 국내 수학여행과 가족 단위 관광의 대표 목적지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1990년대 이후에는 단순 관광을 넘어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세계유산도시총회 등 대형 국제행사를 유치하며 명실상부한 컨벤션 중심지로 성장했다.

현재 보문단지의 총면적은 약 8.52㎢에 달하며, 테마파크, 식물원을 비롯한 오락시설과 숙박업체 110여 곳이 운영되고 있다. 연간 수백만 명의 국내외 관광객이 찾는 한국 관광산업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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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신라 화랑이 달렸던 보문벌, 불교문화 성역의 역사

보문단지는 관광개발 이전부터 깊은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땅이었다.

단지 일대는 신라시대 화랑들이 말을 타고 달리며 심신을 수련했다는 명활산 기슭의 '보문벌(普門伐)'이었다. '보문벌'은 "보문보살의 자비가 두루 미치는 넓은 들판"이라는 뜻으로, '보문(普門)'은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을 일컫는 보문보살에서 유래한 용어다.

이곳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참배하러 가는 주요 길목으로 신라 불교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삼국유사 등 고문헌에는 이 일대를 "동해를 향한 불국토의 관문"으로 묘사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신라인들에게는 성역으로 여겨졌다.

신라 사찰 기록에는 '보문벌에서 불교 의례와 국가 주요 행사가 빈번히 개최됐다'는 내용도 전해진다. 이처럼 보문단지는 천년 전 신라의 정신문화가 깃든 역사적 무대 위에 현대 관광산업이 꽃핀 상징적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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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C회의장 하이코컨벤션센터

화백 컨벤션센터, 신라 정신과 현대 건축미의 조화

보문단지에서 역사와 미래가 가장 조화롭게 어우러진 공간은 2025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경주 화백 컨벤션센터(HICO)'다.

국제행사 유치를 목표로 1,200억원을 투입해 건립된 이 센터는 2015년 문을 열었다. 연면적 3만1,336㎡, 지하 1층·지상 4층 규모로 최대 4,3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다.

센터의 명칭 '화백(和白)'은 고대 신라에서 국가의 중대사와 법률을 만장일치제로 의결하던 귀족 회의 제도를 의미한다. 합의와 소통을 중시했던 신라의 민주적 전통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건축 설계에도 신라의 역사적·문화적 요소가 섬세하게 반영됐다. 건물 외관의 유려한 곡선과 구조는 신라의 누각과 금관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전면에는 신라의 상징인 '천마'의 힘찬 비상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설치해 역동성과 기상을 표현했다.

야외 연못은 신라 왕실 정원인 동궁과 월지(안압지)를 재해석했고, 중앙 입구는 방문객을 맞이하는 '신라의 관문'이라는 상징성을 담아 설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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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C 대비하는 화백 컨벤션센터

내부 공간에 구현된 천년 전통과 빛의 예술

센터 내부 역시 신라 미학으로 가득하다. 대형 로비 공간은 신라 궁궐의 대청마루를 연상시키도록 넓고 개방적으로 조성됐다.

천장과 벽면, 바닥의 패턴은 신라 전통 문양인 연꽃, 삼각형, 원형을 모티브로 디자인됐다. 특히 자연광이 실내로 충분히 유입되도록 설계해 시간대별 빛의 변화에 따라 공간이 다채롭게 느껴지도록 했다. 이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건축으로 구현한 것이다.

APEC 준비 지원단 관계자는 "2005년 부산에서 APEC 정상회의가 열렸을 때도 한미 정상회담이 보문관광단지에서 개최된 바 있다"며 "보문단지가 정상회의 개최지로서 시설, 경호 환경, 역사적 의미 등 모든 면에서 최적지임을 이미 입증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각국 정상과 참석자들은 보문단지의 빼어난 자연경관과 현대적 휴양시설은 물론, 신라의 역사와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정상회의장에서 천년 고도 신라 고유의 아름다움과 정신을 온전히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보문단지는 이번 APEC 정상회의를 통해 한국의 문화유산과 현대적 관광·컨벤션 인프라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모범 사례로서 세계에 그 가치를 알릴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