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에서 철새들에게 먹이는 주는 농부들. AI생성 이미지
매년 겨울, 수십만 마리의 철새들이 찾아오는 우리나라의 주요 습지 및 하구 일대가 철새들의 안전한 월동을 위한 ‘생태 식탁’ 마련에 분주하다.
특히 경남 창원시는 대표적인 철새 도래지인 주남저수지를 찾는 겨울철새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볍씨와 미꾸라지 등 대규모 먹이를 공급하는 계획을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창원시의 이번 겨울철새 먹이주기 사업은 단순한 먹이 제공을 넘어, 철새들의 서식 환경 보전을 포함한 입체적인 접근으로 주목받고 있다.
시는 자체 예산을 확보해 지역 농민들로부터 철새 먹이용 볍씨 21톤을 사들였다. 이 볍씨는 매일 40㎏짜리 6포대씩, 철새들이 가장 자주 찾는 주남저수지 옆 송용들 및 백양들 일대에 정기적으로 살포된다.
또한, 물을 좋아하는 고니, 청둥오리 등의 수조류를 위해 주남저수지 연꽃단지에는 미꾸라지 300㎏을 방류해 철새들이 자연적으로 먹이를 사냥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이는 자연 생태계의 먹이 사슬을 보강하는 동시에 조류인플루엔자(AI) 발생 위험을 낮추는 효과도 기대된다.
무엇보다 창원시의 선도적인 노력은 지역 농가와의 상생 모델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시는 국비와 지방비를 합쳐 총 6억 원을 투입, 주남저수지 주변 의창구 동읍과 대산면 일대 280여 농가와 ‘생물다양성 관리계약’을 체결했다. 계약을 맺은 농가는 겨울철새 도래 시기에 맞춰 추수 후 논에 볏짚을 수거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거나(볏짚 존치), 철새 먹이용 보리를 파종하고 보리싹을 재배하는 방식으로 철새들의 안정적인 먹이터 및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
이러한 다각적인 노력 덕분에 창원시 의창구 동읍과 대산면에 걸쳐 있는 주남저수지는 낙동강 수계의 핵심 도래지로서 고니, 재두루미, 가창오리 등 수많은 겨울철새가 매년 10월 중순부터 찾아와 이듬해 2월까지 월동을 이어간다.
철새 먹이주기 활동에 시민단체들도 적극 나서고 있다. 주남환경학교, 한국조류보호협회 창원지회는 지난 16일 '재두루미 먹이나눔 행사'를 열었다. 주남환경학교 제공
전국 지자체, ‘맞춤형’ 먹이 공급으로 철새 보호 앞장
창원시 외에도 전국 각지의 지자체들은 겨울철 급격히 줄어드는 먹이원으로 인해 탈진하거나 아사할 위험에 놓인 철새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역 특성에 맞는 다양한 먹이 지원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농지 환경을 활용한 ‘생태계 서비스 지불제’ 계약이나 혁신적인 먹이 제공 방식이 주목받고 있다.
충남 서산 천수만: 늦벼 수확 및 대규모 볏짚 존치
충남 서산의 천수만 간척지는 국내 최대 철새 도래지 중 하나로, 수십만 마리의 기러기떼와 고니가 월동하는 곳이다. 서산시는 수년 전부터 농업인들과 ‘생물다양성 관리계약’을 체결해 철새 먹이와 휴식처를 체계적으로 제공해왔다.
서산시의 노력은 창원시와 유사하게 농경지를 활용하는 방안에 중점을 둔다. 철새들이 이용하기 쉽도록 휴경지에 벼를 심고도 늦게 수확하거나, 아예 수확하지 않고 논에 그대로 벼를 남겨 놓는다.
또한, 수확 후에도 볏짚을 걷지 않고 논바닥에 그대로 놔두는(볏짚 존치) 면적이 2,600ha가 넘을 정도로 광범위하여, 볏짚에 남아있는 낱알이 철새들에게는 풍부하고 안정적인 먹이원이 된다. 농가에게는 보상비를 지급함으로써 철새 보전과 농가 소득 증대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경기 고양시 장항습지: 압수 곡물 활용 및 드론 급식
경기 고양시의 장항습지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인 재두루미 등 3만 마리 이상의 철새가 도래하는 람사르 습지이다.
고양시는 창의적인 방식으로 먹이 문제를 해결해 눈길을 끈다. 바로 인천본부세관에서 압수한 곡물류(녹두 등) 약 1톤을 폐기하지 않고 철새 먹이로 활용한 것이다. 이는 폐기 시 발생하는 환경오염 및 탄소 배출을 줄이고, 양질의 먹이를 무료로 확보하는 자원 순환적 생태 보전 사례로 평가받는다.
고양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장항습지 철새 드론 급식 봉사대’를 결성해 매주 2회, 500㎏에서 1톤 가량의 볍씨 등을 드론을 이용해 습지 내부에 살포한다. 사람이 직접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까지 친환경적이며 안정적으로 먹이를 공급하는 첨단 방식이다.
아울러 고양시 역시 ‘생태계서비스지불제’ 계약을 통해 볏짚 존치 및 벼 수매를 병행하여 철새 서식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지난 3월 경기 고양시 장항습지 농경지에서 열린 철새 먹이주기 행사에서 이동환 시장이 행주어촌계에서 제공받은 물고기를 살포하고 있다. 고양시 제공
경남 김해시 화포천습지: 독수리 식당과 민관 협력
창원시 인근에 위치한 김해시도 화포천습지로 날아드는 겨울철새 보호에 적극적이다. 화포천습지는 독수리, 큰고니 등 천연기념물과 멸종위기 야생생물이 대거 월동하는 중요한 생태 보금자리이다.
김해시는 2013년부터 독수리 등 맹금류를 위한 먹이주기 사업을 집중적으로 펼쳐왔는데, 특히 ‘화포천 독수리 식당’ 프로그램을 운영해 지역 주민과 관광객을 대상으로 생태 교육과 먹이 나누기 체험을 함께 제공한다. 독수리가 멀리 날아오느라 탈진하거나 아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돼지 부산물, 볍씨, 고구마 등 다양한 먹이를 공급한다.
이 사업은 지역 기업인 효성그룹과의 업무협약을 통해 매년 일정 금액 이상의 농축산물을 기탁받아 진행되는 등 민간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이는 안정적인 먹이 공급 체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지역 농축산물 판로 확대 및 생태관광 활성화에도 기여하는 지속가능한 모델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16일 주남저수지 인근 논에서 먹이 활동하는 재두루미떼. 주남환경학교 제공
공존의 가치, 미래 세대를 위한 생태계 보전 노력
이들 지역 외에도 겨울철새에 먹이는 제공하는 지자체는 많다. 경북 구미시는 낙동강 해평·강정습지 인근 농경지에 보리와 호밀을 재배하고 볍씨를 먹이로 제공한다.
경기 파주시와 연천군은 임진강 DMZ 일원에서 겨울철새 보전 사업(볏짚 존치, 쉼터 조성 등)을 추진하며 먹이를 제공해왔다.
충남 홍성군과 서천군은 충남도의 '생물다양성 관리계약 사업'을 통해 서산시와 함께 철새 먹이와 휴식처를 제공하고 있다.
전북 군산시와 김제시, 부안군은 금강호와 만경강, 동진강 일원에서 철새 보호를 위한 '생태계서비스지불제 계약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이처럼 전국 지자체들이 펼치는 겨울철새 먹이 지원 사업은 단순한 시혜를 넘어 인간과 자연의 공존 가치를 실현하는 중요한 생태 보전 활동이다. 기후 변화와 서식지 감소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철새들에게 안정적인 ‘식탁’과 ‘쉼터’를 제공함으로써 생물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은, 곧 건강한 생태계를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우리의 책임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