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소장은 “조경이란 사람과 도시의 기억을 만드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광주·전남 지역 조경 설계의 역사를 말할 때, 경인조경설계사무소 김재영 소장을 빼놓기는 어렵다. 25년 전 비닐하우스 컨테이너에서 시작한 작은 사무실은 이제 지역 조경 설계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는 중추로 성장했다. 그 여정에는 늘 현장의 고민, 지역적 제약, 그리고 조경의 본질에 대한 치열한 질문이 함께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지역 조경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비추는 생생한 기록이었다. 인터뷰는 지난 15일 광주서구 상무공원로 그의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비닐하우스에서 싹튼 첫걸음

김재영 소장의 시작은 소박했다. 5년간의 설계사무소 직장생활을 떠나 지인의 도움으로 비닐하우스 안 컨테이너에서 시작했다.

"방부액 냄새 때문에 코피가 나는 공간에서 1년을 버텼습니다. 그때 지역의 한 골프장 증설사업을 맡게 된 게 큰 전환점이 됐었죠."

골프장 업무를 맡으면서 자연스레 인허가 업무에도 정통했다. 그는 단순한 조경 설계뿐 아니라 남들이 힘들어하는 인허가 업무까지 직접 해내며 지역내에서 신뢰를 얻었다. 골프장 인허가를 통해 맺은 인연들이 이후 사무실 성장의 발판이 됐고, ‘경인조경설계사무소’라는 이름이 지역 사회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경인'이란 업체명은 그 무렵 사무실에서 만난 부인(차경인 씨)의 이름을 땄다.

김 소장은 인재난을 조경업계의 가장 큰 위기로 꼽는다.

지역에 없던 길을 개척하다

1990년대 후반, 광주·전남에서 독립적인 조경 설계사무소는 드물었다. 대부분이 토목·건축에 종속된 형태였고, 조경은 부수적인 영역으로 취급됐다. 김 소장은 “죽어도 독립된 사무실을 운영하겠다”는 다짐으로 버텼다.

그는 도로공사 설계 경험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틀을 익혔고, 이후 관급 설계까지 영역을 넓혔다. 지금은 15명의 직원이 매달 50~60건의 업무를 수행하며, 광주·전남 조경 설계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인재난을 가장 큰 위기로 꼽는다. “조경학과가 사라지고, 학생들은 설계를 외면합니다. 인턴조차 오기 힘든 상황이에요.”

지역이 안고 있는 한계

대화는 자연스럽게 지역 조경 산업의 구조적 문제로 이어졌다. 김 소장은 행정의 ‘따라하기식 관행’을 꼬집었다.

“옆 시·군이 성공하면 똑같이 따라갑니다. 지역별 차별화가 필요하지만, 결국은 똑같은 나무, 똑같은 상품이 반복되죠.”

업체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내도 경직된 행정 절차와 예산의 벽에 자주 가로막혔다. 결국 이웃 시·군에서 검증된, 안전한 선택만 반복됐다.

예산의 경직성도 문제였다. “서울이나 경상도는 한 아이템이 좋으면 예산을 더 붙여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광주·전남은 100억 원 그림을 그려도 20억 원, 30억 원으로 줄어들기 일쑤였죠. 그러다 보니 새로운 시도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함평 나비축제. 김 소장은 이 축제 조성에 참여함으로써 조경과 지역 축제에 눈을 뜨게 됐다고 한다.


함평 나비축제에서 배운 것들

하지만 뜻밖에도 전남 함평의 '나비축제'라는 새로운 시도가 경인조경설계사무소 성장의 결정적 무대가 됐다. 1999년 천혜의 자연조춘 함평군이 나비축제를 기획했다. 세계 최초로 살아있는 나비와 곤충, 자연을 소재로 새롭게 시도된 친환경 축제에 김 소장은 각종 시설물과 식재를 맡아 축제를 빛냈다.

“당시 함평은 전국 지자체들이 벤치마킹하러 올 정도로 혁신적이었죠. 새로운 아이디어를 공무원들과 공유하고, 현장에서 검증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제게는 고향 같은 현장입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지역 축제와 조경의 결합’, ‘지방정원의 가능성’이라는 시각을 심어주었고, 이후 경인조경설계사무소가 다양한 공원·정원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 토대가 됐다.

교육의 위기, 미래의 빈자리

김 소장의 사무실 서고는 마치 대학교수 연구실을 방불케 했다. 영어, 독어, 일본어 원서 조경서적들이 커다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조경서적 판매상이 광주에 오면 전남대 조경학과와 자신의 사무실은 꼭 들린다고 했다.

김 소장은 또한 교육 현장에 대한 우려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순천대와 호남대에서 강의를 맡았던 경험을 떠올렸다. “예전처럼 학생들이 조경을 꿈꾸지 않아요. 교수님들도 열정이 줄었고, 현장 체험 기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학생들은 조경이 왜 매력적인지 알지 못한 채 졸업합니다.”

그는 인턴십과 현장 실습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학교와 사무실, 그리고 현장이 연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연결고리가 거의 끊어진 상황이라는 점에서 깊은 우려를 드러냈다.

김재영 소장 사무실 서고는 교수 연구실인가 착각할 정도로 수많은 조경 관련 원서들로 가득하다.

협업과 차별화 그리고 앞으로의 바람

경인조경설계사무소는 지역에서 처음으로 CG팀을 운영하고, 드론을 활용한 설계를 시도한 곳이다. 또 디자인 회사와 협업해 독창적인 시설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벤치나 파고라 같은 기성품 대신 직접 디자인을 도입했습니다. 포토존, 조형물 같은 것들이 그 결과물이죠.”

이러한 시도는 지역 조경의 수준을 높였지만, 동시에 디자인 업체들이 기획을 독점하는 구조적 부작용도 낳았다. 그는 “좋은 점도 있었지만, 병폐도 함께 만들어냈다”며 냉정히 평가했다.

20여 년간 수많은 프로젝트를 거친 그는 이제 새로운 도전을 꿈꾸기보다, 자신이 과거에 손댔던 공간들을 리모델링하는 데 더 큰 의미를 둔다. “20년 전의 제가 만든 공간을 지금의 제가 다시 만나는 거죠. 그 과정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 묻고, 더 나은 답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는 공원의 ‘순기능’을 강조했다. “관광지처럼 꾸미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본질입니다. 앞으로는 그런 본질에 충실한 설계로 남고 싶습니다.”

김 소장은 “관광지처럼 꾸미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조경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조경은 결국 사람의 기억”

지역 조경업계의 발전 전략을 묻는 마지막 질문에 그는 이렇게 정리했다. “설계, 시공, 학계, 자재업계가 따로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함께 고민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또 우리 같은 규모의 설계사무소가 지역에 몇 군데 더 있어야 건강한 경쟁이 가능합니다.”

김 소장은 끝으로 조경의 본질을 다시 강조했다. “나무 한 그루, 공간 하나에도 각자의 해석이 담깁니다. 조경은 도시의 풍경을 만드는 동시에,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을 짓는 일입니다.”

조경은 단순한 설계나 시공이 아니라 삶의 무대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비닐하우스에서 시작된 김 소장의 여정은, 곧 지역 조경 산업이 품어야 할 고민과 희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