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나 AICON 대표는 "AI는 도구가 아니라 동료"라고 말한다.
도시는 언제나 느리게 자란다. 나무가 햇빛을 향해 몸을 틀 듯, 사람의 삶도 계절의 속도로 바뀐다. 어느 날, 조경 설계의 느릿느릿한 시간에 균열 같은 빛이 들어왔다.
흙과 바람, 물과 시간으로 진행되던 조경 설계의 세계에 ‘데이터’와 '인공지능(AI)'이라는 새로운 결이 더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복판에서, 조경 설계가 AI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끌어갈지 누구보다 앞서 실험한 이가 있다. 이하나 AICON 대표다. 디자인 전문회사인 HEA 연구소장이던 그는 최근 독립을 선언했다. 회사이름에 AI가 들어간 것은 우연이 아닐 터이다.
지난 14일 서울 상일동 한국종합기술 2층 교육장에서는 한국종합기술 조경부 창립 40주년을 기념한 세미나 2주차 강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 이 대표가 섰다. '조경설계 프로세스와 생성형 AI의 창의적 융합'이 이날의 강의주제였다.
조경 설계자, 건설사 실무자, 대학 교수, 학생까지—도면과 현장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AI'라는 단어 하나에 이처럼 열정적인 관심을 보인 건 이례적이다. 이 대표부터 "놀랐다"고 말했다.
이하나 대표의 AI 강의에 조경 설계자, 건설사 실무자, 대학 교수, 학생까지 많은 조경인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시대의 균열: 조경 설계와 AI가 만난 순간
서두에 그는 말한다.
“AI는 도구가 아니라 동료입니다.”
AI와 함께하는 조경설계를 고민하는 이 대표의 말에서 우리는 조경의 다음 세대가 어떻게 확장될지 조용한 확신을 듣게 된다.
“조경업계는 아직 AI의 초입에 있습니다. 그러나 건축·도시·IT는 이미 다른 속도로 달리고 있어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날 강의는 단순한 기술 소개가 아니라, AI 시대에 조경 설계가 존재하는 방식 자체를 다시 묻는 시간이었다.
이 대표가 AI를 바라보는 관점은 단호했다.
“AI는 포토샵이나 CAD처럼 ‘기능적 도구’가 아닙니다. 하나의 성격을 가진 존재이고, 함께 일하는 동료에 가깝죠.”
그는 PPT 1페이지에 자신의 PC 바탕화면을 띠웠다. GPT, Claude, Gemini, Grok 등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6개의 AI를 PC 바탕화면 즐겨찾기에 올려뒀다. 그는 하루 업무 대부분을 AI와 함께 시작한다.
어떤 AI는 정교한 논리를, 어떤 AI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또 어떤 AI는 다이어그램을 즉시 만들어낸다. 그는 이렇게 제언한다.
"여러분 PC 첫 화면이 MS 엣지나 구글 크롬 같은 검색엔진으로 돼 있다면 당장 생성형 AI로 바꾸십시오."
"AI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동료""라는게 이 대표의 지론이다.
"AI는 도구가 아니라 동료"
그는 AI와 협업하는 설계자의 자세를 담담히 풀어냈다. 회사 동료로 여기라는 것이다. 똑똑한 신입사원 5~6명을 곁에 두고 일하는 것 같다는 세간의 얘기와 일맥상통한다.
“여러 AI와 대화하면 마치 팀 회의처럼 브레인스토밍이 됩니다. 여섯 명의 인턴이 동시에 답변하는 셈이지요.”
하지만 AI를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AI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AI는 잘 틀린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AI의 가장 큰 특징이 ‘거짓말을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오류를 잡아주는 과정에서 전문가의 역할이 더 필요해집니다. 비판적 사고가 가장 중요한 기술이 됐어요.”
두번째, AI는 ‘사용자가 아는 만큼 답한다'는 것이다. AI에게 제대로 질문하려면 설계 원리, 단면 구성, 공간 위계 등 조경 설계의 ‘본질’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가 ‘스케일이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면 AI가 다시 고쳐줍니다. 결국 제가 아는 만큼 바뀌는 거죠. 무조건 AI에게 의존하면 엉뚱한 결과를 얻어 AI와 멀어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
조경 설계의 모든 영역을 재편하는 AI 실험
이 대표는 지난 2년간 조경 설계 전 단계를 AI로 실험했다. 관련 논문도 여러 편 썼다.
단순 시각화가 아니라, 분석 → 구성안 → 디자인 → 단면 → 렌더링 → 보고서 → 평가까지 설계 전 프로세스를 포괄했다.
이 대표는 지난 2년간 조경 설계 전 단계를 AI로 실험하면서 논문도 여러 편 썼다.
“도면 세 장이면 공간 구조가 나와”
그가 보여준 첫 사례는 놀라웠다. 위치도·평면도·배치도를 AI에 업로드하자 곧바로 다음 내용이 생성됐다. 주변 상권 분석, 주요 접근 동선, 공간 위계를 고려한 광장·녹지 배치, 인구 흐름 예측 등이 그것이다.
“이 정도면 신입사원들과의 회의보다 빠릅니다.”
그는 웃으며 말했지만, 실은 이 변화의 무게감이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강의장이 쥐죽은 듯 고요했다.
이 대표의 AI 실험 중 가장 유명한 파트는 ‘스타일 생성’이다. 같은 지시어를 내렸지만 설계회사의 철학을 반영해 AI는 각기 다른 결과물을 내놓은 것이다.
사사키의 직선적 도시공간, MVVA의 촘촘한 식재 감성, Field Operations의 다층적 공공공간 등 설계회사의 특성을 AI가 반영해 하나의 공간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설계에 들어있는 구성 콘텐츠는 같은데 회사의 이전 프로젝트 스타일, 심지어 설계 철학까지 반영한 다른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대표는 AI를 활용해 미술사조 기반의 설계작품을 비교설명하고 있다. 위 작품은 다다이즘을 반영한 작품.
미술사조·세계적 조경회사 스타일로 생성
그는 AI가 미술사조 기반으로 설계작품을 만드는 과정도 소개했다. 같은 조경 작품을 야수파, 추상표현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등 사조별로 AI에게 요구하니 공원 구성 자체가 달라졌다. 생성형 AI는 마치 오래전부터 해오던 일인 것처럼 손쉽게 뚝딱 처리했다.
그는 AI를 활용하면 “사람이 하지 않았던 설계, 혹은 할 수 없었던 설계가 나온다"고 강의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 ‘비현실성 때문에 사람이 안 한 것 아닐까요?’라는 질문도 자주 받는다고 했다. "그 비현실성이 새로운 창의성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AI가 무서운 건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요?”
이 대표의 실험정신이 투철해 서울어린이대공원 식물원리모델링 조경설계공모의 심사능력까지 검증했다. 결과는 실제 사람의 삼사결과와 동일했음을 확인했다.
심사위원 능력까지 갖춘 AI
그는 서울 어린이대공원 리뉴얼 공모전 자료를 AI에 입력해 ‘심사’를 요청했다. AI의 심사 능력까지 검증해본 것이다.
그는 AI에게 설계안 전체 분석, 심사 기준 반영, 개별 기준 가중치별 점수화, 최종 순위 산출을 요구한 결과 놀랍게도 실제 인간의 심사 결과와 동일했다.
“1200장의 제안서를 사람이 다 본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제 공모 심사는 사람이 5, AI가 5로 나눌 수 있는 시대가 올 겁니다.”
경계가 사라지는 시대: 건축·조경·도시가 하나로
그는 강의 후반에 건축·조경·도시 경계가 빠르게 흐려진다고 강조했다.
특히 건축 자동화 AI가 조경 설계를 하기 시작한 현상을 언급했다.
“구글 AI는 이미 공원과 정원을 설계합니다. 다만 조경 전문가가 없어서 엉성할 뿐이에요. 그 말은, 반대로 우리가 건축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는 뜻입니다.”
AI 시대, ‘전문 분야’는 고정되지 않는다.
질문하는 능력, 데이터를 해석하는 능력, 창의적 해석 능력을 가진 사람이 새로운 설계의 주인이 된다.
교육의 대전환: “대학 커리큘럼도 따라와야 한다”
강의 중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질문은 ‘교육’이었다. AI 활용 능력을 채용 기준으로 요구하는 시대에, 대학 교육은 여전히 뒤처져 있다는 지적이었다. 이 대표도 적극 공감했다.
“맞습니다. 커리큘럼이 바뀌어야 합니다.설계 실습도 중요하지만 AI를 이해하고 다루는 능력 자체가 하나의 역량이 됐어요.”
그는 최근 쓴 논문에서도 “AI 리터러시가 교육의 핵심 키워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소개했다. 서울시립대 등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도 이미 진행했다.
“학생이 AI를 잘 쓰면 10년 경력자보다 빠른 결과물을 만들 수 있어요. 이 변화를 교육이 따라가지 못하면 세대 격차가 더 커집니다.”
이 대표의 PC 바탕화면은 AI 즐겨찾기로 시작된다.
“오늘 당장 바탕화면을 AI로 바꿔라” — 그의 마지막 조언
강의의 끝자락에서 이 대표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AI를 잘 쓰는 조경가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AI를 쓰지 않는 조경가는 사라집니다.”
그는 처음 AI를 접하는 조경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바탕화면을 AI 검색창으로 바꿔라
▲하루 최소 10개 이상의 프롬프트를 던져라
▲다른 분야 전문가의 AI 활용 방식도 모니터링하라
▲‘정답’을 기대하지 말고 비판적으로 대화하라
그는 이렇게 말한다. "AI에게 무엇을 어떻게 물을 수 있는가, 그 차이가 설계의 깊이를 결정합니다.”
이 대표는 "조경은 건축분야와 달리 오히려 예술성 기반의 설계가 강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조경 설계 AI는 언제 등장하나요?” — 강의장에서의 질문들
1시간의 강의 뒤 참석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Q. 건축은 이미 자동화 AI가 평면도·단면·브로셔까지 뽑아주는데, 조경도 곧 그런 시대가 오나요?
“조경은 변수의 양이 건축과 비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일조량, 기후, 해수면 상승, 동식물 경관, 프로그램, 이용객 흐름까지…. 그래서 자동화가 더디지만, 일부 영역은 이미 가능합니다.”
다만 그는 전망을 이렇게 정리했다.
“조경은 오히려 예술성 기반의 설계가 강화될 것입니다. 자동화되지 않는 영역이 분명히 있어요.”
Q. AI를 쓰면 신입사원 채용이 줄어드는 건가요?
“대체되는 건 직업이 아니라 AI를 쓰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최근 글로벌 스타트업 채용 기준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문성 + AI 활용 능력. 이 두 가지가 있으면 업무 퍼포먼스가 10~20배까지 차이가 납니다.”
Q. 회사 보안 문제 때문에 AI 사용이 고민됩니다. 이미지 업로드가 위험한가요?
“AI 결과물은 그때그때 다릅니다. 같은 이미지를 넣어도 다른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스타일 노출’을 우려할 필요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렇게 덧붙였다.
“보안이 걱정되면 사내 전용 모델을 구축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Q. 학생들은 어떤 AI 버전을 써야 하나요? 비용이 너무 큽니다.
“모든 걸 유료로 쓸 필요는 없습니다. 무료 모델만으로도 70% 이상 가능합니다. 다만 전문 설계자는 어쩔 수 없이 유료 버전 하나쯤은 있어야죠.”
그는 챗GPT와 Gemini 유료버전을 쓴다고 했다. Gemini 무료 버전도 똑똑하지만 이미지생성과 합성에 능한 '나노바나나'를 쓰기위해 유료버전을 쓴다고 한다.
그의 주장은 명확했다. 조경의 미래는 결국 사람이다.
AI는 조경을 위협하는 기술이 아니라, 조경을 더 깊고 넓게 만들 새로운 언어다.
그리고 그 언어를 가장 먼저 구사하는 조경가들이 한국의 설계 현장에서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미래의 도시를 만들어가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