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규제의 선두에 섰던 유럽연합(EU)이 최근 규제 완화 기류로 방향을 틀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는 내년 1월 세계 최초로 AI 관련 기본법을 전면 시행하는 국가가 될 예정이다.
그러나 산업계, 특히 중소·스타트업 업계에서는 “규제가 혁신보다 앞서 나가고 있다”는 우려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법은 생겼는데 현장은 준비 안 돼”
우리나라는 내년 1월 22일부터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AI 기본법)’을 시행한다. AI 관련 포괄 법률을 제정한 국가는 EU에 이어 두 번째지만, 실제 전면 적용 시점은 우리나라가 가장 빠르다.
EU AI법은 단계적 시행 방식을 택해 금지 AI는 이미 일부 시행됐고, 고위험 AI 규제와 범용 AI 규제는 내년 8월 이후 순차 적용될 예정이다. 반면 한국은 시행과 동시에 사실상 전 분야에 법적 의무가 발생한다.
업계에서는 “법의 취지는 이해하지만, 준비 기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AI 기본법 시행령이 법 시행 불과 한 달여를 남기고 입법 예고되면서, 실제 대응 시간은 더욱 줄어들었다.
“시행령은 막판 확정, 기업은 깜깜이 대응”...스타트업에 더 가혹한 구조
한국인터넷기업협회는 AI 기본법의 가장 큰 문제로 ‘불확실성’을 꼽는다. 시행령이 법 시행 직전까지 확정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고, 세부 규정 해석 역시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기업은 법무·컴플라이언스 인력을 투입해 대응할 수 있지만, 인력과 자금이 부족한 스타트업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국내 AI 스타트업 101곳을 조사한 결과, 98%가 AI 기본법에 대한 실질적 대응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고 답했다.
응답 기업의 절반가량은 “법 내용을 잘 모르고 준비도 안 돼 있다”고 밝혔고, 나머지 역시 “법은 인지하고 있지만 대응은 미흡하다”고 답해 현장의 혼란을 드러냈다.
EU도 발을 빼는 AI 규제...“왜 한국만 서두르나” 회의론
지난달 EU 집행위원회는 규제 부담을 줄이기 위한 ‘디지털 간소화 방안’을 발표하며 AI 규제 적용 시점을 2027년 말로 늦출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쳤다. 미국 빅테크의 압박과 AI 경쟁력 약화에 대한 내부 우려가 작용한 결과로 풀이된다.
AI 업계와 전문가들은 “AI 규제의 상징이던 EU마저 속도 조절에 나서는 상황에서, 한국이 가장 먼저 전면 시행에 나서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선택인지 되묻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은 자율 규제, 한국은 강제 규제...스타트업의 시선, 해외로
AI 기본법 시행을 앞두고 일본 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국내 AI 스타트업이 늘고 있는 것도 업계 불안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올거나이즈, 업스테이지, 무하유 등 다수의 AI 기업이 일본 법인을 설립하거나 사업 확대에 나섰다.
일본은 과태료 부과나 강제 조사권을 전면에 내세운 한국과 달리, 업계 자율 규제를 중심으로 한 ‘소프트 거버넌스’ 방식을 채택했다.
일본 정부는 AI 가이드라인을 통해 딥페이크 대응, 데이터 투명성, AI 리터러시 강화 등을 유도하되, 법적 강제보다는 자발적 준수를 강조한다.
업계에서는 “규제가 강한 곳을 피해 기업이 이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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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 중단 리스크 현실화”...갑작스러운 규제 전환의 후폭풍
AI 기본법이 예정대로 시행될 경우, 국내에서 운영 중인 일부 AI 서비스가 갑자기 수정되거나 중단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법 적용 범위와 책임 기준이 불명확한 상태에서 기업이 보수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내년 1월 22일 이후 어떤 서비스가 위법이 될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 입장에서는 차라리 서비스를 접거나 해외로 이전하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콘텐츠 업계 직격탄...“AI 생성물 낙인, 시장 위축 불가피”
AI 콘텐츠 업계가 가장 크게 우려하는 부분은 ‘AI 생성물 표시(워터마크) 의무’다.
딥페이크 범죄 등 AI 악용 사례를 막기 위한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모든 AI 활용 콘텐츠에 동일한 규제를 적용하는 것은 과도하다는 주장이다.
한 AI 콘텐츠 기업 대표는 “AI 콘텐츠라고 해도 실제로는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이 참여해 기획·편집·보정을 거친 결과물”이라며 “AI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AI 생성물’이라는 딱지가 붙으면 소비자 인식이 급격히 나빠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AI 생성물 표시 의무의 적용 범위와 기준이 모호한데, 명확한 가이드 없이 시행부터 하겠다는 것은 산업 현실을 외면한 처사”라고 지적했다.
“신뢰 구축이 아니라 혁신 위축”...AI 기본법, 재조정 필요성 대두
산업계는 AI 기본법의 목표인 ‘신뢰 기반 조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충분한 의견 수렴과 단계적 적용 없이 법 시행을 서두를 경우, 그 부담은 고스란히 혁신 주체인 기업들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한 AI 업계 관계자는 “AI 기본법이 신뢰를 키우기보다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며 “지금 필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산업 현실을 반영한 정교한 조정”이라고 말했다.
AI 기본법 시행을 앞둔 지금, 한국이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보다 ‘지속 가능한 AI 생태계’를 선택할 수 있을지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