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장 군락지인 제주 월령마을 전경

화산활동으로 생성된 제주 특유의 검은 현무암 사이로 솟은 선인장과 에메랄드빛 바다.

제주시 한림읍 월령마을 겨울 바다는 마치 남미의 어느 해안을 옮겨놓은 듯 이국적이다.

노란 꼿을 피웠던 여름과 달리 월령리의 선인장은 자색 열매를 맺은 모습으로 겨울 손님을 맞는다. 푸른 바다와 하얀 파도, 초록 선인장과 자색빛 열매가 어우러진 색의 대비는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다. 멀리 풍력발전기마저 선인장 마을의 오묘한 계절 변화를 지켜보는 듯하다.

안내판을 따라 목재 산책로를 나서면, 현무암과 어우러진 천연기념물 '월령리 선인장 군락'이 펼쳐진다. 회색 구름이 드리운 겨울 하늘 아래에도 선인장의 생명력은 여전히 강렬하다.

국내 유일의 야생 군락지인 제주 월령리 선인장 군락지의 둘레길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온 멕시코의 선물

월령리의 선인장 군락은 약 6,914㎡의 해안 바위틈과 마을 돌담에 분포하고 있다. 이곳의 선인장이 어떻게 제주에 자리 잡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멕시코가 원산지인 선인장이 쿠로시오 난류를 타고 열대지방으로부터 밀려와 야생하게 된 것으로 보는 견해다.

최근의 학술조사에 따르면 백여 년 전 '당동 할아버지'가 바닷가에서 발견해 퍼뜨렸다는 월령리 주민들의 구전도 있으며, 1920년대 제주 출신 원양어선 선원이 적도 부근에서 가져왔다는 설도 제기된다. 어떤 경로로 왔든, 이 선인장들은 척박한 제주의 환경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군락을 이루며 월령리의 상징이 되었다.

월령리 주민들은 선인장의 형태가 손바닥과 같다 하여 '손바닥선인장'이라 부른다. 예로부터 주민들은 뱀이나 쥐의 침입을 막기 위해 집 울타리인 돌담에 선인장을 옮겨 심었고, 이것이 마을 전체로 퍼지게 되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국내 유일의 야생 군락

1972년 식물학자 부종휴 박사가 발견한 월령리 선인장 군락은 2001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1972년 식물학자 부종휴 박사에 의해 발견된 월령리 선인장 군락은 당시 한반도 유일의 선인장 자생 군락이었다. 이 발견은 식물학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남미의 사막 기후에서나 볼 수 있는 선인장이 한반도, 그것도 제주의 해안가에서 야생으로 자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었다.

이러한 분포학적, 학술적 가치와 주민들의 생활에서의 민속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월령리 선인장 군락은 1976년 9월 9일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25년 뒤인 2001년 9월 11일, 천연기념물로 승격 지정되며 그 가치를 국가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주민들은 월령리의 선인장을 '손바닥 선인장'이라고도 한다

2008년에는 천연기념물의 이미지를 살리고 친환경적으로 정비하기 위해 총 4억 원을 투입해 길이 214m, 너비 2.5m 규모의 목재 산책로가 조성되었다. 팔각정자와 경사로가 설치되어 휠체어와 유모차를 탄 방문객도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현무암 사이로 펼쳐진 선인장 군락을 따라 걸으며, 바다의 짠 내음과 선인장의 신선한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이 산책로는 월령리를 찾는 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올레길과 함께 서부 관광 거점으로

천연기념물 지정에 이어 2009년 이곳을 지나는 제주 올레 14코스가 완성되면서 본격적인 관광 명소로 떠올랐다.

18.9km에 이르는 올레 14코스 중반부에 자리한 월령리는 이색적인 선인장 돌담길과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구간으로, 산책객과 도보 여행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한라산과 오름, 올레길로 대표되던 제주 관광에 '선인장 마을'이라는 독특한 매력이 더해지면서, 월령리는 제주 서부 관광의 새로운 거점으로 자리매김했다.

월령리에는 마을 안내 지도를 비롯해 다양한 벽화가 관광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월령리의 매력은 단순히 선인장 군락지에만 머물지 않는다. 월령포구 근처의 해안 산책로는 바다와 선인장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마을 곳곳에는 귀엽고 정감 있는 벽화가 그려진 '선인장 마을 길 찾기 지도'가 있어 방문객들에게 즐거운 탐방 경험을 선사한다. 바다와 선인장, 집들이 알록달록한 색채로 표현된 이 지도는 월령리의 따뜻한 마을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낸다. 일부러 이 길을 걷기 위해 근처 숙소를 예약하는 관광객들이 늘고 있으며, 산책로 끝에 있는 월령해수욕장도 여름 휴양지로 인기를 얻고 있다.

백년초, 주민들의 소득원이 되다

선인장(백년초)의 열매나 줄기를 이용해 가공된 다양한 월령 백년초 제품

백년초라는 이름은 '100가지 질병을 고칠 수 있고, 백년을 살 수 있는 효능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 예로부터 천식, 소염, 해열제 등으로 쓰이며 민간약으로 활용되어 온 백년초는 1990년대부터 건강식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마을 한 판매장에는 인체 경혈도와 함께 백년초가 어떤 건강상 이점을 제공하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백년초는 식품을 넘어 건강·미용 분야로까지 활용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월령리 일대의 카페에서는 선인장 주스와 백년초 레몬에이드를 판매하며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메뉴 개발에도 적극적이다.

백년초 제품을 보다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제품 다각화, 스토리텔링을 통한 브랜딩 강화, 체험형 관광 연계가 필요하다. 특히 월령리만의 독특한 자생 군락지 스토리를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주민 참여 등 지속 가능한 관광 마을 조성위해 노력

선인장 군락지 산책로를 따라 월령리의 관광지형이 변화하고 있다

월령리는 생태적 가치와 지속가능성을 함께 추구하는 보존과 활용의 관광마을을 추구한다.

접근성이 떨어지고 대형 관광지에 비해 홍보 부족한 한계는 있지만, 대규모 개발 대신 생태 보전 중심의 정비와 주민 참여형 관광 콘텐츠 확대에 집중하고 있다. 선인장 생태 해설, 백년초 수확·요리 체험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관람 중심에서 체험형 관광으로 전환을 시도하며, 조용하고 이색적인 자연 환경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매력을 더하고 있다.

또한 백년초 가공 상품의 브랜드화, 온라인 판매 확대 등으로 주민 소득을 높이는 방안이 추진 중이다. 외부 자본 유입보다는 주민이 직접 운영하는 지역 순환형 관광 모델을 조성해 공동체 활성화와 생태 보존의 균형을 도모하고 있다.

월령리는 선인장이 자생한 생태적 기적과 주민의 삶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무분별한 개발보다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통해 제주의 서부권에서 지속가능한 관광 거점으로 자리잡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