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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디자인이 도시의 얼굴을 바꿀 수 있을까?
서울 중구가 최근 충무로 골목상권에 선보인 '이순신1545' 브랜딩 프로젝트는 이 질문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변이다.
단순한 시각 요소의 통일을 넘어, 역사적 인물의 서사를 도시 전체의 비주얼 아이덴티티(Visual Identity)로 내재화하려는 이 시도는 공공디자인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1545년의 정신, 디지털 폰트로 부활하다
'이순신1545' 디자인의 출발점은 충무공 이순신의 탄신 연도인 1545년과 그가 임진왜란 중 기록한 '난중일기'다.
2015년 아산시는 충무공 탄신 470주년을 맞아 난중일기 속 붓글씨를 디지털 서체로 복원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장군이 전장에서 보여준 강직하고 속도감 있는 필치의 특징을 현대적 환경에 맞게 재해석한 '이순신체'가 탄생한 것이다.
서울 중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장군의 출생지라는 역사적 정통성을 바탕으로 '1545'라는 숫자를 전면에 내세운 도시 브랜드를 구축했다. 숫자가 가진 직관성과 서체가 지닌 서사성의 결합. '이순신'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현대적 아이콘으로 전환시킨 전략적 선택이었다.
'이순신1545'를 활용한 LED브랜드판. 중구 제공
서울 중구: 골목상권과 결합한 마이크로 브랜딩
중구의 실험은 관공서 홍보물을 넘어 시민의 일상이 흐르는 충무로 골목상권으로 확장됐다. 충무로2길 44개 점포에 설치된 LED 브랜드판은 전구색의 따뜻한 조도를 활용해 강직한 서체에 온기를 더했다. 야간 경관 개선과 노후 상권 이미지 쇄신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셈이다.
주목할 점은 디자인 거버넌스의 방식이다. 대학생 옥외광고 연합동아리 'RE:SIGN'의 재능기부로 제작된 74개 입간판은 공공디자인이 민관학 협력 모델로 작동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난립했던 상업 광고물이 정제된 타이포그래피 시스템으로 통합되면서 상권 전체에 시각적 질서가 부여됐다. 공공디자인이 단순히 '예쁜 간판 만들기'가 아니라 도시 경제와 커뮤니티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다.
박동춘 충무로 골목형상점가 회장은 "예전에는 골목이 뭔가 산만했는데 통일된 디자인으로 싹 바꾸니 훨씬 단정해지고 골목이 하나로 이어진 느낌"이라고 말했다.
아산시: 오리지널리티의 수호자
이순신 디자인의 발원지인 아산시는 서체를 공공행정의 표준 디자인 시스템으로 안착시켰다. 시청 현판부터 도로 표지판, 버스 정류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도시 인프라에 이순신체를 적용하며 도시 전체에 일관된 보이스를 부여했다.
현충사를 중심으로 한 역사 유적지에 현대적 디자인 요소를 결합한 접근 역시 주목할 만하다. 전통과 현대가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는 '디자인 도시 아산'의 정체성이 공고해지고 있다.
여수시: 전승의 서사를 담은 경험 디자인
이순신 장군의 주 활동무대이자 승전지인 여수시는 디자인을 통해 전장의 긴장감과 승리의 서사를 극대화한다. 이순신 광장과 거북선 조형물 주변의 안내 시스템은 이순신1545 디자인의 강렬한 필치를 활용해 관람객에게 역동적 경험을 선사한다.
여수의 밤바다와 어우러진 경관 조명 디자인에 충무공의 서사를 결합한 전략도 효과적이다.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역사적 체험의 공간'으로 브랜드 가치를 제고하는 엑스페리엔셜 디자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디자인 해부: 왜 '이순신1545'인가
디자인적 관점에서 이 브랜드가 성공적 평가를 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타이포그래피의 힘. 붓글씨의 질감을 살리면서도 획의 끝부분을 날카롭게 마감해 장군의 기개를 시각화했다. 유기적 곡선과 기하학적 직선의 긴장감이 서체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둘째, 확장성. '1545'라는 숫자는 로고, 패턴, 애플리케이션 디자인 등 다양한 매체에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는 기하학적 구조를 갖췄다. 브랜드의 생명력은 확장성에 달려 있다.
도시의 유전자를 디자인하다
서울 중구의 충무로 프로젝트는 공공디자인이 지역의 유전자를 찾아내어 이를 시각적 언어로 번역하고, 다시 경제적 가치로 환원하는 과정임을 증명한다. '이순신1545'는 이제 서울에서 아산을 거쳐 남해안에 이르는 'K-디자인 벨트'의 핵심 자산으로 자리 잡았다.
역사적 자산이 디자인이라는 옷을 입었을 때, 도시는 비로소 자신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완성한다. 이것이 바로 공공디자인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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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1545'를 활용한 입간판. 중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