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폐기물로 뒤덮였던 섬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현대 예술의 명소로 탈바꿈한 '나오시마'

오카야마 우노항에서 배편으로 나오시마로 향하는 아침, 바다 너머로 보이는 작은 섬은 이미 예술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호남디자인산업협회 정원 순례단과 함께한 나오시마 일정은 '섬이 곧 미술관'이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실감케 했다. 미야우라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전 세계 예술가들의 숨결이 섬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땅속 깊은 곳에서 만난 빛의 마법, 지중미술관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 건물 대부분이 지하에 건축된 '지중미술관'

첫 방문지인 지중미술관에 들어서는 순간, 안도 다다오 특유의 기하학적 콘크리트 구조가 순례단 일행을 맞는다. 2004년 개관한 이 지하 미술관은 이름 그대로 땅속 깊이 묻혀 있지만, 자연 채광만으로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을 비추는 장면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었다.

"자연광이 시간에 따라 변하면서 모네의 그림도 완전히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고 한 참가자가 감탄했다. 실제로 오전과 오후, 구름의 움직임에 따라 작품이 살아 숨쉬는 듯한 변화를 목격할 수 있었다.

지중 미술관은 정원을 거닐며 작가들의 그림을 직접 마주하는 듯한 구성되어 있다.

지하로 내려가는 동선 자체가 일상에서 예술 공간으로의 전이를 의미하는 듯했다. 땅속 깊이 들어가며 빛과 그림자, 공간과 작품이 어우러지는 명상적 분위기는 단순한 전시 관람을 넘어선 영적 체험에 가까웠다.

한국 작가의 철학이 담긴 정원, 이우환미술관

미술관 자체를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느끼게 하여 유명세를 얻고 있는 '이우환미술관'

지중미술관에서 도보로 이동한 이우환미술관은 또 다른 감동을 안겨주었다. 2010년 개관한 이 개인 미술관 역시 안도 다다오의 설계로, 이우환의 '모노하(物派)' 철학을 공간으로 구현해 낸 역작이다.

아쉽게도 실내 촬영이 금지되어 내부 작품들을 사진으로 담을 수는 없었지만, 미술관 정원에 설치된 작품들만으로도 공간 예술가인 이우환의 세계관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반지하 구조 건물 외부에 놓인 돌과 철판의 조합은 작가가 평생 추구해온 '만남과 마주침'의 철학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는 공간에서 관람객에게 사유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이우환 작품

"돌 하나, 철판 하나의 배치인데도 이렇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달하다니." 한 참가자의 말처럼, 절제된 재료의 만남이 만들어내는 깊은 울림이 인상적이었다. 미술관 내부의 점과 선 연작들과 마찬가지로 정원의 작품들 역시 자연과 인공물의 절제된 만남을 통해 명상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계곡 속 숨겨진 보석, 밸리갤러리

1700여 개의 구슬이 골짜기와 호수에 뒤덮인 '밸리 미술관'

이우환미술관에서 걸어서 몇 분 거리에 위치한 밸리갤러리는 2022년 개관한 베네세아트사이트의 최신 시설이다. 입구에서부터 곳곳에 배치된 스테인리스 구와 불상들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안도 다다오가 나오시마 남부 계곡 지형을 그대로 활용해 설계한 이 지하 미술관은, 자연 경관을 전혀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웅장한 지하 공간을 창조해냈다. 계곡의 자연 채광이 지하까지 스며들어 시간대별로 변화하는 빛의 드라마를 연출하는 장면은 건축가의 자연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었다.

나오시마 섬에서 나오는 폐기물로 제작된 작품 '불상 88'

"입구에서 전시 공간까지 걸어 내려가는 동안 마치 자연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고 한 순례단 참가자가 소감을 밝혔다. 실제로 건물 동선 자체가 일상에서 벗어나 예술에 몰입할 수 있도록 설계된 하나의 여정이었다.

바다와 예술이 만나는 완벽한 하모니

'바다 위의 미술관’으로 불릴 만큼 독특한 예술의 성지로 자리 잡은 나오시마

나오시마 곳곳을 돌아다니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미술관들이 자연스럽게 섬의 지형과 어우러져 있다는 점이었다. 각 미술관마다 정원과 조경이 작품의 연장선상에서 기획되어 있어, 건물 밖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예술적 경험이 계속 이어졌다.

특히 바닷가에 자리한 공간들에서는 예술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풍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바닷바람에 실린 예술의 여운과 함께 작품들이 주변 환경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전시였다.

예술가들은 나오시마의 폐기물을 지역의 기억과 산업의 흔적으로 해석했다.

지역과 예술을 잇는 세토우치 트리엔날레의 힘

하루 종일 나오시마를 돌아다니며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세토우치 트리엔날레가 단순한 예술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과거 인구 감소로 어려움을 겪던 작은 섬이 예술을 통해 어떻게 전 세계인들이 찾는 문화적 성지로 변모할 수 있는지를 생생히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미술관마다 전 세계에서 온 관람객들이 진지하게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고, 지역 주민들도 자연스럽게 예술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섬의 카페나 상점들도 예술적 감각으로 꾸며져 있어, 일상 공간까지 하나의 작품처럼 느껴졌다.

한때 쇠락한 제철소 섬이었던 나오시마는 예술과 주민들의 협력으로 '예술의 섬'으로 변했다.

"이것이 진짜 지역 재생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이 지역과 여행을 하나로 묶어내면서 지속 가능한 문화 생태계를 만들어낸 나오시마의 실험은, 우리나라 지역 문화 정책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페리를 타고 나오시마를 떠나면서, 바닷바람에 실린 예술의 여운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과 자연, 그리고 지역의 주민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담아내는 깊은 성찰이 필요함을 깨닫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