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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학리항 등대. 부산해수청 제공

부산 어촌의 등대가 지역의 역사와 산업, 주민의 기억을 담은 조형물로 거듭나며 어촌마을 재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항로 안전을 위한 기능시설에 머물던 등대가 이제는 마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관광 자산이자, 쇠퇴한 해안 공간을 되살리는 도시재생의 촉매로 역할을 확장하고 있다.

부산지방해양수산청은 기장군 학리항에서 ‘등대를 활용한 어촌마을 환경개선 사업’을 완료하고 22일 준공 기념식을 열었다. 이 사업은 어촌계 등 주민 아이디어를 반영해 기존 등대를 지역 특색을 살린 테마형 상징시설로 조성하는 주민 주도형 경관 개선 프로젝트다.

이번에 완공된 조형물 등대는 기장군 학리항동암어항, 영도구 하리항 등 3곳이다.

학리항 등대에는 지명 상징성을 살린 학(鶴) 그래픽을, 동암어항 등대에는 미역과 다시마 등 지역 대표 수산물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적용했다.

하리항 등대는 19세기 후반 제주 해녀들의 이주로 시작된 부산 해녀 역사를 반영해 해녀 모형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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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암어항 등대. 부산해수청 제공

부산, ‘이색 등대 벨트’로 확장되는 해안 경관 전략

기장군 일대는 이번 학리항·동암어항 등대에 더해 대변항 장승 등대, 칠암항 야구 등대, 임랑항 물고기 등대 등 기존 조형물 등대가 밀집해 있다. 개별 시설로는 작은 변화에 그칠 수 있지만, 선형(線形) 관광 동선으로 묶일 경우 지역 체류형 관광 자원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부산해수청은 내년 영도구 중리항과 기장군 공수항 등대도 환경개선 사업에 포함하는 등, 장기적으로 부산 전역 어촌마을 등대를 대상으로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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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리항 등대. 부산해수청 제공

전국으로 확산되는 ‘스토리 있는 등대’ 실험

부산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도 지역 서사와 결합한 이색 등대가 해안 관광과 도시재생의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북 포항 호미곶 해맞이 광장이다. 한반도 해맞이 명소인 호미곶의 상징인 '상생의 손'과 국내 유일의 국립등대박물관이 관광객을 이끈다. '상생의 손' 조형물은 왼손은 육지에서 오른손은 바다에서 서로 마주 보며 화합과 상생을 상징한다. '상생의 손'과 등대 박물관은 연중 포항 관광 수요를 끌어들이는 핵심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단순 조망 시설을 넘어 지역 축제와 연계된 상징 경관으로 기능한다.

제주 이호테우 해변의 말(馬) 등대는 제주 토착 문화인 조랑말을 형상화해 해변 산책로와 야간 경관을 동시에 살린 사례다. 카페 거리와 연계되며 젊은 층 관광객 유입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생활형 관광 자산으로 평가받는다.

전남 여수 오동도 등대는 기존 등대에 해양공원과 산책로, 전망 시설을 결합해 ‘머무는 등대’로 진화했다. 섬 관광과 도시 관광을 연결하는 관문 역할을 하며 여수 밤바다 관광의 핵심 동선으로 기능한다.

강원 강릉 주문진 방사제의 커플 등대는 빨간색과 흰색 등대가 나란히 서 있는 경관을 활용해 사진 명소로 자리 잡았다. 어업 중심 항구에 관광 이미지를 덧입힌 소규모 재생 사례로 꼽힌다.

경남 통영 소매물도 등대는 조형성보다 자연 경관과의 조화를 극대화한 사례다. 섬 트레킹 코스의 종착점에 위치한 등대는 체험형 해양 관광의 상징으로 활용되며, ‘찾아가는 등대 관광’의 대표 모델로 평가된다.

제주 이호테우 해변의 말(馬) 등대


기능시설에서 문화 인프라로… 등대의 역할 재정의

전문가들은 이 같은 흐름이 “대규모 개발이 아닌 소규모 상징 투자로 지역 이미지를 바꾸는 전략”이라고 분석한다. 등대는 이미 존재하는 기반시설이기 때문에 추가 토지 이용이나 환경 훼손을 최소화하면서도, 디자인과 스토리텔링만으로 공간의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김강온 부산해수청 항행정보시설과장은 “어촌마을 등대가 단순한 선박 통항 안전시설을 넘어 마을의 정체성과 이야기를 담은 해양 문화공간으로 기능하도록 지원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해안을 따라 점처럼 흩어진 등대들이 선으로 연결될 때, 지역은 새로운 관광 지도를 갖게 된다. 불빛의 역할을 넘어 지역을 비추는 상징으로 진화하는 등대가 해양 도시재생의 또 다른 해법으로 떠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