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영 교수와 현대건설 팀이 수상한 작품 '정원이 속삭이다'. 현대건설 제공


정원은 단순히 식물이 모여 있는 공간이 아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의미와 쓰임새가 달라지고, 때로는 예술의 언어로 속삭인다.

해외 실무 경험과 학문적 연구를 두루 쌓아온 최혜영 교수(성균관대)는 이번 영국 정원 박람회 수상작 ‘정원이 속삭이다(Garden whispers)’를 통해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새롭게 해석했다.

그는 지난 7월 영국 왕립원예협회(RHS) 주최 정원 박람회인 ‘웬트워스 우드하우스 2025’에 현대건설 최연길 책임 팀과 협업한 ‘정원이 속삭이다'로 실버 길트(Silver Gilt) 상을 받았다.

최 교수는 “정원은 문화로 자리 잡아야 한다. 지금의 과열된 흐름이 아닌, 지속 가능한 뿌리 내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최혜영 교수는 "한국 정원문화가 지속가능한 뿌리내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해외에서 쌓은 실무 경험

최 교수의 경력은 학문보다 실무에서 먼저 출발했다. 그는 학부에서 조경을 전공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디자인스쿨에서 조경과 건축을 배우고 현장에서 경력을 쌓았다.

“외국에서는 졸업 후 바로 설계사무소에 취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오랫동안 해외 사무소에서 실무를 했어요.”

특히 네덜란드의 세계적 조경회사 웨스트 에잇(West 8)에서 활동하며 용산 미군기지를 공원으로 전환하는 국제공모 당선작에 참여했다.

“프로젝트 담당자로 한국에 파견돼 오랫동안 일했습니다. 생각보다 긴 과정 속에서 나중엔 대학교로 자리를 옮기게 됐지만, 여전히 설계와의 연결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지난 7월 영국 왕립원예협회(RHS) 주최 정원 박람회인 ‘웬트워스 우드하우스 2025’ 현장. 아래쪽에 최 교수팀의 작품이 보인다. 현대건설 제공


정원 디자인 철학: 인공과 자연의 대비

영국 정원 박람회 출품작 '정원이 속삭이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493개의 하얀 폴(기둥)이다. 이는 자연보다 인공이 앞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 교수는 그 안에서 오히려 ‘자연의 속삭임’을 담아내고자 했다.

“정원이라고 해서 식물만으로 공간을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조경은 본래 포장재, 시설물, 건축 요소까지 함께 어우러집니다. 인공적 재료지만, 그 배치와 감각이 자연의 경험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는 정원을 ‘위요된 공간’으로 이해한다. 위요(圍繞)란 어떤 지역을 둘러싼다는 뜻이다.

“정원은 본래 집 앞마당이나 뒷마당처럼 둘러싸인 공간에서 즐기는 것이었습니다. 하얀 폴들은 위요감을 주고, 그 안에서는 오히려 순수한 자연을 경험하게 되죠.”

심사위원과의 충돌, 문화적 차이

심사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은 작품의 낯섦에 당혹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영국은 여전히 시골집 정원 전통에 익숙해요. 동양에서 온 우리가 ‘오리엔탈 가든’을 보여주길 기대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전혀 다른 현대적 정원을 보니 생소했던 거죠.”

작품은 혁신성과 임팩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디테일한 시공에서 아쉬운 지적도 있었다고 한다.

2018년 울산 태화강 정원박람회에 최혜영-허비영 팀이 출품했던 '영원한 고래'. 이번 작품의 모티브가 됐다. 태화강 정원박람회 제공

과거 경험에서 이어진 실험

최 교수는 이번 작품이 갑작스러운 시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2018년 울산 태화강 정원박람회에서 흰색 폴을 활용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그때는 폴의 높이가 모두 같았고, 중앙에 고래 조형물을 설치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고래가 떠다니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죠. 이번에는 그 실험을 확장해 폴의 높이를 달리하며 물결 같은 흐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조경은 유머와 예술성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외부 공간을 설계할 때 위트와 감각을 담고 싶었어요. 이번 작품도 그런 맥락에서 탄생했습니다.”


학생들과의 현장 경험

이번 프로젝트는 교육자로서의 고민도 함께 담겼다. 최 교수는 대학생 두 명을 영국 현장으로 데려가 시공 과정에 직접 참여하게 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낯선 현장에서 힘든 일을 해야 했지만, 학생들은 끝까지 버텼습니다. 그들의 적극성과 에너지가 대견했어요. 무엇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이었을 겁니다.”

그는 후배들에게 늘 같은 조언을 한다.

“많이 보고 경험하되, 그것이 진짜 자기 것이 되려면 버티고 숙성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쉽게 옮기지 말고, 최소 3년은 한 자리에서 배워라.”

지난 7월 ‘웬트워스 우드하우스 2025’에서 현지 박람회 관계자들과 환담 중인 최연길 책임(왼쪽에서 두번째)와 최혜영 교수(가운데). 현대건설 제공


한국 정원 문화에 대한 비판적 시선

최 교수는 한국 정원문화의 최근 붐을 다소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2005년 순천만 정원박람회를 계기로 법이 제정되고, 예산이 투입되면서 정원이 사회적 이슈가 됐습니다. 국가정원, 지방정원, 정원도시까지 계속 새로운 타이틀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문화는 돈을 풀어 만든다고 생겨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원도 마찬가지여서 오랜 시간 쌓여야 착근한다는게 그의 판단이다.

그는 현재 국내 조경계가 과열 양상을 띤다고 본다. 반짝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지속 가능한 흐름을 만들때 한국 정원산업의 미래가 밝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교육자, 설계자, 협업자로서 미래 전망

정원은 역사적으로 개인의 영역이었지만 최근 한국에서는 공공 영역에 집중되고 있다. 공동주택 조경이 개인 조경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주거 타입이 공동주택인 만큼 아파트 단지의 조경이 사실상 한국형 정원이라고 볼수 있다.

그래서 그는 기업과의 협업을 긍정적으로 본다.

“설계자가 아이디어를 내고, 기업은 그것을 상품화합니다. 서로의 역할이 다르지만, 함께할 때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어요.”

최 교수와 현대건설은 이번 수상작 ‘정원이 속삭이다(Garden whispers)’를 서울 방배동 디에이치 단지에 재현할 예정이다. 세계적 정원 작품이 아파트 앞마당에 들어선다면, 일상의 풍경이 달라질 것으로 믿는다.

최 교수는 지금도 설계와 연구의 끈을 놓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설계를 가르치고, 현장에서는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실제 경험을 하게 하는 것도 빠트리지 않는다.

이번 작품에 앞서 지난해 현대건설이 건립한 서울 둔촌동 올림픽마크프레온 단지에 조성된 최혜영 교수 작품. 폴을 동원한 점에서 이번 작품과 닮았다. 현대건설 제공


그는 향후에도 다양한 실험을 이어가고 싶다고 했다.

“정원은 시대마다 달라집니다. 자연과 인공, 전통과 현대, 그 사이에서 새로운 언어를 찾고 싶습니다. 그리고 학생들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고 싶어요.”

최 교수의 언어에는 학문적 냉철함과 현장 경험에서 우러난 생생함이 함께 녹아 있다. 그는 한국 정원 문화가 지금의 열기 속에서 지속 가능성을 찾을 때 비로소 뿌리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정원이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을 줄 아는 감각, 그것을 사회와 교육 현장에 전하는 일이 그의 과제다.

에필로그

현대건설 최연길 책임과 최혜영 교수의 시선은 서로 다른 듯 닮아 있다. 한쪽은 건설사라는 현실 속에서 조경을 상품으로 끌어올리고, 다른 한쪽은 학문과 문화 속에서 정원의 뿌리를 더 깊게 내려다본다. 그러나 둘 다 정원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삶의 질을 바꾸는 문화적 자산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