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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에이고동물원의 갈라파고스땅거북 그래마 [San Diego Zoo Wildlife Alliance / AP=연합
19세기에 태어나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 20명이 넘는 미국 대통령의 임기를 지켜본 ‘살아있는 역사’가 샌디에이고 동물원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미국 샌디에이고 동물원의 명물인 갈라파고스땅거북 '그래마(Gramma)'가 고령에 따른 뼈 질환으로 인해 141세의 나이로 안락사 처분되었다는 소식은 전 세계에 큰 울림을 준다.
그래마는 1884년 갈라파고스섬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샌디에이고 동물원 개장보다도 훨씬 이전의 일이다. '할머니'를 친근하게 이르는 이름처럼 다정하고 수줍음 많은 성격으로 동물원의 '여왕'으로 불렸던 그래마는, 야생동물 관리 전문가 가족들이 곁을 지키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찰스 다윈의 연구 대상이었던 거북 세대와 인연을 맺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래마의 삶은, 장수 동물이 품고 있는 생명의 신비와 진화의 비밀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갈라파고스땅거북의 '정화' 능력과 장수 유전자
갈라파고스땅거북이 100년 이상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느린 신진대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근 연구는 이들이 선천적으로 뛰어난 '자가 보호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낸다. 그래마를 포함한 갈라파고스땅거북은 노화에 따라 축적되는 독성 물질을 생리적으로 '정화'하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다.
나아가, 이들은 장수 및 종양 억제와 관련된 유전자를 다른 동물들보다 중복으로 더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 '유전자 중복(gene duplication)' 덕분에 세포가 손상되거나 변질될 경우, 종양으로 발전할 기회를 얻기 전에 스스로 사멸하는 '세포자멸사(apoptosis)' 과정을 거쳐 암 발생을 억제한다. 즉, 이들은 손상된 세포를 제거하는 데 있어 다른 거북 세포보다 훨씬 더 민감하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셈이다.
거북이 넘어, 지구 최고령 척추동물 그린란드상어
육상 동물 중 장수의 상징은 단연 거북이지만, 바다에는 이들의 수명을 압도하는 존재들이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 산 척추동물은 바로 그린란드상어이다. 북대서양의 차갑고 깊은 수심에 서식하는 이 상어는 평균 수명이 무려 4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린란드상어의 놀라운 장수 비결은 서식 환경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극도로 낮은 수온(저온) 환경은 상어의 평균 체온을 낮추고, 체내의 생화학 반응과 신진대사 속도를 늦춘다.
느려진 대사 속도는 세포 노화 역시 지연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들은 태어난 지 15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번식이 가능한 나이가 될 정도로 느린 삶의 속도를 자랑한다.
포유류의 최장수 기록 보유자, 북극고래
포유류 중에서는 북극해에 서식하는 북극고래(Bowhead Whale)가 가장 긴 수명을 자랑한다. 이들은 200년 이상 생존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19세기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작살 조각이 몸에 박힌 채 발견되어 그 수명이 입증되기도 했다.
북극고래 역시 그린란드상어와 마찬가지로 저온의 해역에 살며 느린 신진대사 속도를 가진다. 특히, 고래와 코끼리처럼 거대한 덩치를 가진 동물은 세포의 수가 많아 암 발생 위험이 높아야 하지만, 북극고래는 암을 억제하는 유전자가 발달하여 대형 포유류임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특성을 보인다.
영생에 도전하는 불멸의 존재, 작은보호탑해파리
일부 동물들은 아예 노화의 개념을 거부하는 듯한 생존 방식을 보여준다.
'불멸의 해파리'로 불리는 작은보호탑해파리(Turritopsis dohrnii)가 대표적이다. 이 해파리는 신체적으로 손상을 입거나 환경이 나빠지면 성체에서 유생 단계인 폴립 상태로 되돌아가는 '역노화' 현상을 일으킨다.
이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이론적으로는 영원히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이는 생물학적으로 '불멸'이라는 개념에 가장 가까운 사례로 꼽힌다.
물론, 자연 상태에서 포식자에게 잡아먹히거나 질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할 수는 있으나, 외부 위험 요인이 없다면 생물학적 노화는 겪지 않는 경이로운 존재다.
장수 동물들의 공통점: 느림과 강력한 DNA 보호
거북, 그린란드상어, 북극고래 등 다양한 종에 걸친 장수 동물들에게서는 몇 가지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느림의 미학'이다. 이들 대부분은 차가운 환경에 서식하거나 본질적으로 느린 신진대사를 가지며, 이는 세포 분열 속도를 늦춰 DNA 손상과 노화의 축적을 최소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두 번째 공통점은 '강력한 게놈 안정성'이다. 갈라파고스땅거북처럼 암 억제 유전자의 복제 수를 늘리거나, DNA 손상 복구 능력이 뛰어나고, 염색체 말단인 텔로미어의 손실을 억제하는 유전자를 가진 경우가 많다.
이처럼 자연적으로 진화된 '내부 방어 시스템'은 그들이 오랜 세월을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궁극적인 비결로 분석된다.
샌디에이고 동물원의 여왕이었던 그래마는 비록 141세의 나이로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녀의 긴 여정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의 신비와 놀라운 회복력, 그리고 장수 유전자의 비밀을 후대에 전하는 귀한 유산이 되었다.
현재 190세를 넘어선 세이셸코끼리거북 '조나단'처럼, 장수 동물들의 삶은 우리 인간에게도 노화와 질병 극복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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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중인 갈라파고스땅거북 그래마 [San Diego Zoo Wildlife Alliance / AP=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