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세운상가에서 본 종묘 공원과 종묘
국가유산청과 협의 없이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바깥에서의 개발 규제를 완화한 서울시 조례 개정이 유효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이로써 최근 '왕릉뷰 아파트' 재현 우려가 제기된 서울 종묘 맞은편 세운4구역 재개발 사업도 탄력을 받게 됐다.
2년 법정공방 끝에 서울시 승소
대법원 1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6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서울시의회를 상대로 낸 '서울특별시 문화재 보호 조례' 일부개정안 의결 무효확인 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분쟁은 2023년 9월 서울시의회가 보존지역 바깥에서의 건설공사 규제 조항을 삭제하는 조례 개정안을 의결하면서 시작됐다. 문화유산법(옛 문화재보호법)상 시·도지사는 지정문화유산의 역사문화환경 보호를 위해 국가유산청장과 협의해 조례로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을 정해야 하는데, 서울시는 이를 '국가지정유산의 외곽경계로부터 100m 이내'로 규정해왔다.
서울시의회가 삭제한 조례 19조 5항은 '보존지역 범위를 초과하더라도 건설공사가 문화재에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하다고 인정되면 문화재 보존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를 검토한다'는 내용이었다.
서울시 "과도한 규제" vs 문체부 "문화재 보호 후퇴"
서울시의회는 해당 조항이 상위법인 문화재보호법보다 포괄적인 과도한 규제라며 개정을 단행했다. 보존지역 밖까지 지나치게 규제하면 도심 재개발 사업이 과도하게 제약받는다는 게 이유였다.
반면 당시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국가유산청장과 협의를 거쳐야 한다고 반발했다. 보존지역 밖이라도 문화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 해당 조항을 삭제하면 문화재 보호가 크게 후퇴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서울시의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개정 조례를 공포했고, 문체부가 조례 무효 소송을 제기하면서 2년여간 법적 공방이 이어졌다.
X
종묘 앞, 세운4구역 모습
대법원 "보존지역 밖까지 협의 의무 없어"
2년여의 소송전 끝에 대법원은 서울시의회의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은 "문화유산법 및 시행령 관련 규정의 문언과 취지에 비춰 상위법령은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을 초과하는 지역에서의 지정문화유산 보호를 위한 사항까지 국가유산청장과 협의해 조례로 정하도록 위임했다고 해석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문화유산법상 시·도지사가 국가유산청장과 협의해야 하는 내용은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을 정하는 문제이므로, 보존지역 밖에 대해서까지 협의를 거치거나 관련 규정을 둘 필요는 없다는 설명이다.
대법원은 이어 "법령의 범위를 벗어나 규정돼 효력이 없는 조례를 개정 절차를 통해 삭제하는 것은 적법한 조례 제·개정 권한의 행사로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유효하다"고 판시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의회가 조례안을 의결하면서 당시 문화재청장(국가유산청장)과 협의를 거치지 않았더라도 법령 우위 원칙에 위반되지 않는다"며 문체부 청구를 기각했다.
법리 해석의 핵심 쟁점
대법원 판결의 핵심은 문화유산법의 엄격한 문리 해석이다. 법령상 협의 대상은 명확히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100m 이내)'의 설정과 관리에 한정되며, 보존지역 밖까지 협의 대상으로 확대 해석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원래 조례 19조 5항이 법령 범위를 벗어난 과도한 규제였으므로, 이를 삭제하는 것은 오히려 법령 우위 원칙을 회복하는 적법한 조치라고 판단했다. 보존지역 밖 규제는 지방자치단체의 자치입법권 영역이며, 중앙정부가 협의권을 근거로 지자체 입법권을 과도하게 제약할 수 없다는 법리도 적용됐다.
소송 중 조례 대체...소의 이익은 인정
당초 소송 대상인 서울특별시 문화재 보호 조례가 폐지되고 '서울시 국가유산 보존 및 활용에 관한 조례'로 대체되면서 소의 이익이 인정되는지도 쟁점이었다.
대법원은 "원고가 위법성을 문제 삼고 있는 해당 조항의 삭제 상태는 현행 조례에서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고, 궁극적으로 이 사건 현행 조례의 재개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소의 이익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다만 문체부가 제기한 예비적 청구(현행 조례 자체의 무효 확인)에 대해서는 "원고가 현행 조례의 의결에 대해 참가인(서울시장)에게 재의 요구 지시를 거치지 않고, 현행 조례 그 자체의 무효를 구하는 것은 지방자치법상 허용되지 않는다"며 각하했다.
지방자치법에 따르면 주무부처 장관은 시·도 지방의회 의결에 법령 위반 등 사유가 있다고 판단되면 해당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재의를 요구하도록 지시할 수 있고, 만약 지자체장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직접 지방의회를 상대로 소를 제기할 수 있다.
X
세운4구역 재개발 본격화...종묘 경관 논란은 계속
이번 판결은 최근 '왕릉뷰 아파트' 재현 우려가 나온 서울 종묘 맞은편 세운4구역 재개발 사업과 관련해 주목받았다.
서울시는 지난달 30일 세운4구역 높이 계획 변경을 뼈대로 한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및 4구역 재정비촉진계획 결정'을 고시했다. 이에 따라 세운4구역의 건물 최고 높이는 당초 종로변 55m, 청계천변 71.9m에서 종로변 101m, 청계천변 145m로 변경됐다. 최고 높이 145m에 이르는 고층 빌딩이 들어설 길이 열린 셈이다.
종묘 경관 훼손 우려가 제기됐으나 서울시 측은 세운4구역이 종묘로부터 약 180m 떨어진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100m) 밖이라 규제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서울시는 이날 대법원 선고 후 "20여년간 정체돼 온 세운4구역 재정비사업의 차질 없는 추진에 힘을 얻게 됐다"며 "종묘를 더욱 돋보이게 할 대형 녹지축 형태의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국가유산청 "세계유산 지위 상실 막겠다"
반면 국가유산청은 판결 결과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국가유산청은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한다"면서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종묘가 재발로 인해 세계유산의 지위를 상실하는 일이 없게 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그러면서 "문화유산위원회, 유네스코를 비롯한 관계 기관과 긴밀히 소통하면서 필요한 조치를 준비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판결로 보존지역 밖 지역에 대한 개발 규제가 완화되면서 도심 재개발 사업이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하지만 세계유산 경관 보호와 도심 개발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