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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압각수'. 청주시 제공

"죄 없는 자를 하늘이 살렸다."

고려 말의 혼란스러운 정국 속,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하던 대학자 목은(牧隱) 이색(1328~1396)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한 그루의 은행나무였다.

900년의 세월 동안 충북 청주를 묵묵히 지켜온 이 전설 속의 나무, '청주 압각수(鴨脚樹)'가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이 된다.

26일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자연유산위원회는 최근 회의를 열고 청주 중앙공원에 위치한 '청주 압각수'를 국가지정문화유산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는 안건을 가결했다.

대홍수 속에서 피어난 생명의 이야기

청주 압각수가 품고 있는 가장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1390년(공양왕 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성계 일파가 명나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무고(이초의 난)로 인해, 고려의 충신이자 대학자인 이색은 청주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청주 고을에 기록적인 대홍수가 들이닥쳤다.

물이 옥사까지 차오르는 절체절명의 순간, 이색은 감옥 바로 옆에 서 있던 거대한 은행나무 위로 급히 몸을 피했다.

거센 물살 속에서도 나무는 굳건히 버텼고, 이색은 나무 위에서 가까스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조선 전기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은 이 사건을 두고 공양왕이 "이색의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한 것"이라 여겨 그를 석방했다고 전한다.

압각수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한 시대의 지성을 구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지켜본 산증인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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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압각수' [청주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오리 발'을 닮은 900살의 수호신

'압각수'라는 독특한 이름에도 재미있는 유래가 있다. 은행나무 잎의 모양이 마치 오리 발(鴨脚)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수령이 약 900년으로 추정되는 이 노거수는 높이 23.5m, 둘레 8.5m에 달하는 웅장한 자태를 자랑한다. 오랜 세월 풍파를 견디면서도 매년 가을이면 어김없이 온몸을 샛노랗게 물들이며 청주 시민들에게 계절의 변화를 알린다.

현재 '청주읍성도'를 비롯한 여러 고지도와 문헌에도 압각수의 모습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이 나무가 예로부터 청주의 랜드마크이자 신성한 존재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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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압각수' 관련 내용을 담은 '택리지' 표지와 압각수 관련 내용을 기술한 부분. 국가유산청 제공

역사적 가치 인정받아... "유일한 압각수"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는 용문사 은행나무 등 총 25그루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청주 압각수가 가진 스토리텔링의 힘과 역사적 가치는 독보적이라고 평가한다.

지정 조사에 참여한 한 전문가는 "단순히 오래된 나무를 넘어, 구체적인 인물과 사건이 얽힌 역사적 서사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라며 "수많은 은행나무 별칭 중 유독 이 나무만이 '압각수'라는 고유한 이름으로 불려온 점도 문화적 가치를 더한다"고 설명했다.

국가유산청은 조만간 관보를 통해 청주 압각수의 천연기념물 지정을 공식 고시할 예정이다. 900년 전 한 사람의 목숨을 구했던 나무는 이제 나라가 인정하고 보호하는 소중한 유산으로 우리 곁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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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중앙공원 압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