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야마 공원 전망대에서 본 가고시마 시내와 사쿠라지마.


겨울의 초입 12월 초, 일본 큐슈 최남단 가고시마는 계절의 시계가 더디게 가는 듯했다. 뺨을 스치는 바람에는 살짝 냉기가 있었지만, 대지는 여전히 늦가을의 온기를 온전히 품고 있었다.

이곳에서 인간이 자연을 경외하며 빚어낸 정원 '센간엔'과, 그 너머로 지금도 살아 꿈틀대는 거대한 지구의 심장 '사쿠라지마'를 마주했다. 섬세함과 거침, 차가움과 뜨거움이 공존하는 그곳으로의 여정을 기록한다.

센간엔은 오래전 사쓰마(현 가고시마) 번주의 별장이다.


화산을 품 안으로 들인 별천지: 센간엔(仙巌園)

1658년, 사쓰마(현 가고시마) 번주 시마즈 가문이 빚어낸 별장 '센간엔'에 들어섰다. 이곳은 권력자가 자연을 어떻게 사랑하고, 또 어떻게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싶어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다.

12월 초의 센간엔은 가을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었다. 정원 초입, 비에 촉촉하게 젖은 검은 모래자갈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길옆으로는 오랜 세월을 견뎌온 듯 이끼 낀 석등이 고즈넉하게 자리를 지키고, 그 뒤로 둥글고 정갈하게 다듬어진 관목들이 겹겹이 초록의 파도를 이루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정성스럽게 빗질을 해놓은 듯 단정한 풍경이었다.

정원 연못 넘어 붉게 물든 단풍나무와 이국적인 야자수가 묘한 조화를 이뤘다.


발길은 자연스레 정원 중앙의 연못으로 향했다. 수면을 가득 메운 수생 식물들 사이로 소박한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 너머로는 붉게 물든 단풍나무와 이국적인 야자수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서 있었다.

상록수의 짙은 초록과 활엽수의 화려한 붉은빛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계절을 잊은 별천지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정원의 중심 건물인 '고쇼(御殿)' 앞엔 오랜 세월을 견뎌온 이끼 낀 석등이 고즈넉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원의 중심 건물인 '고쇼(御殿)' 주변은 일본 정원의 정수를 보여주는 듯했다. 팔작지붕의 우아한 곡선 아래로 고목이 가지를 넓게 드리우고 있었다. 잎을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와 아직 붉은 잎을 매달고 있는 나무가 어우러져 늦가을의 정취를 더했다.

건물 앞 연못가에 정교하게 쌓아 올린 돌무더기와 그 사이를 흐르는 물길, 그리고 주변을 장식한 정갈한 나무 울타리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기보다 철저한 계산하에 배치한 인공의 아름다움이었다.

11월 센간엔에서는 국화 축제가 열렸다. 노란 국화꽃으로 지붕과 탑신을 가득 채운 3층 탑 조형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발길을 돌려 11월 하순 국화 축제가 열린 곳으로 향했다. 노란 국화꽃으로 지붕과 탑신을 가득 채운 3층 탑 조형물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화려한 노란빛 뒤로는 상록수림이 짙은 병풍처럼 펼쳐져 색의 대비를 이뤘다. 꽃향기에 취해 걷다 보니 어느새 정원 깊숙한 곳, 단풍 터널이 나타났다.

센간엔 뒷길, 붉고 노란 단풍잎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붉고 노란 잎들이 하늘을 가릴 듯 빽빽하게 들어찬 길이었다. 비에 젖은 돌계단 위로 낙엽이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대신 축축하고 폭신한 감촉이 전해졌다. 그 길 끝에 서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정원 어디에서나 고개를 들면 담장 너머로 웅장한 사쿠라지마와 푸른 긴코만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센간엔의 진정한 절경은 '차경(借景)'에 있었다. 정원 어디에서나 고개를 들면 담장 너머로 웅장한 사쿠라지마와 푸른 긴코만이 한눈에 들어왔다.

영주는 실로 탐욕스러운 심미안을 가졌던 모양이다. 저 거대한 활화산을, 바다를 통째로 자신의 정원 배경으로 끌어들이다니. 앞바다를 연못으로 삼고 화산을 정원석으로 여긴 그 대담함 속에는 인간의 오만함과 동시에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나무와 돌로 단순한 세련미를 뽐내는 센간엔 정원.


때마침 비가 갠 하늘, 사쿠라지마 위로 일곱 빛깔 무지개가 걸렸다.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와 영롱한 무지개가 어우러진 풍경은 현실감이 없을 만큼 몽환적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정원과 신의 자연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정원의 고요 속에서 저 웅장한 화산을 바라보며, 문득 그 뜨거운 심장부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사쿠라지마 위로 일곱 빛깔 무지개가 걸렸다. 하얀 연기와 영롱한 무지개가 몽환적이었다.


검은 대지 위, 푸른 생명의 역설: 사쿠라지마(桜島)

이튿날 센간엔에서 바라만 보던 화산을, 이제 직접 마주할 차례였다. 가고시마항에서 사쿠라지마행 페리에 올랐다. 24시간 쉼 없이 오가는 배는 이곳 사람들에게는 일상의 버스 같은 존재지만, 여행자에게는 비일상의 세계로 향하는 설레는 관문이다.

잔잔한 긴코만을 미끄러지듯 나아간 지 불과 15분 남짓. 점점 가까워지는 섬은 단순한 풍경을 넘어 압도적인 실체로 다가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마주한 것은 태고의 시간을 간직한 검은 땅이었다. 과거의 대폭발이 남긴 거칠고 날카로운 용암 덩어리들이 길 따라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식어버린 검은 바위들은 아무런 생명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황량하고 비정해 보였다.

척박한 바위 틈에서 소나무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화산을 마주하기 앞서 사쿠라지마항 근처 용암 나기사 공원으로 향했다. 100m 길이의 족욕탕에 발을 담갔다. 땅속 깊은 곳, 마그마가 데워준 뜨끈한 온천수가 노곤해진 여행자의 발을 녹이고, 얼굴로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발밑으로는 화산의 열기를 느끼고 눈으로는 저 멀리 가고시마 시내를 감상하는, 이토록 위험하고도 아늑한 휴식이 또 어디 있을까.

화산 전망대로 가는 길. 자연은 언제나 예상을 뛰어넘는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그 척박한 바위틈, 흙 한 줌 없는 곳에서 기어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난 소나무의 푸름은 실로 눈부셨다. 이곳에서는 흑송(黑松)이라 불렀다.

죽음과도 같은 잿빛 대지 위에서 피어난 강인한 초록의 생명력. 사쿠라지마는 파괴와 탄생이 공존하는 거대한 역설의 공간이었다.

국립공원 사쿠라지마라 쓰인 팻말 뒤로 사쿠라지마가 연기를 내뿜고 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사쿠라지마 활화산을 가까이 볼 수 있는 유노히라 전망대에 올랐다. 해발 373m, 일반인이 접근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다. 눈앞에 펼쳐진 산 정상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위태로워 보였다. 1000m가 조금 넘는 미나미다케(남봉)의 분화구에서는 끊임없이 회색빛 분연(噴煙)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다. 지구가 깊은 곳에서부터 토해내는 거칠고 뜨거운 숨결이었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구름과 한 몸이 되는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존재임을 다시금 실감했다.

센간엔에서 바라본 사쿠라지마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직접 마주하니 그것은 살아 숨 쉬는 거대한 생명체였다. 정원 담장 너머의 배경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뜨겁게 꿈틀대는 지구의 심장이었다.

센간엔 중심 건물인 '고쇼' 앞 단순미가 돋보이는 일본식 정원.


에필로그: 가슴에 남은 불씨 하나

가고시마를 떠나는 길, 시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시로야마 공원에 올랐다. 그 너머 검푸른 바다 건너 여전히 하얀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쿠라지마의 풍경이 눈에 밟혔다.

12월의 가고시마는 섬세함과 거침, 차가움과 뜨거움, 푸른빛과 잿빛이 공존하는 모순의 땅이었다. 그 강렬한 대비 속에서 나는 인간이 자연과 교감하려 했던 숨결을 먼저 마주했고, 이어 지구의 살아있는 맥박을 온몸으로 느꼈다. 매일 뻐끔거리는 저 화산처럼, 내 가슴속에도 쉽게 꺼지지 않을 뜨거운 여행의 불씨 하나가 남았다.

12월의 가고시마는 섬세함과 거침, 차가움과 뜨거움, 푸른빛과 잿빛이 공존하는 모순의 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