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플라스틱 일회용컵.

정부가 일회용 플라스틱 컵의 ‘무상 제공’을 금지하는 방안을 공식화하면서, 한국의 탈(脫)플라스틱 정책이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17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플라스틱 일회용 컵을 지금처럼 무료로 제공하지 못하도록 하고, 소비자가 비용을 부담하도록 하는 방안을 ‘탈플라스틱 종합대책’에 포함하겠다고 밝혔다. 초안은 오는 23일 공개된다.

이번 대책은 단순한 일회용품 규제의 부활이 아니라, 지난 수년간 반복된 정책 번복과 현장 반발 속에서 정부가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를 가늠할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무료 제공이 문제였다”…소비 행태를 겨냥한 정책 전환

기후부가 내놓은 핵심 메시지는 명확하다. 일회용 컵 사용의 문제는 ‘가격 신호’가 사라졌다는 데 있다는 인식이다.

김성환 기후부 장관은 “플라스틱 일회용 컵 가격은 가게가 자율적으로 정하되, 최소한 100~200원 수준의 하한선은 필요하다”고 밝혔다.

현재 일회용 플라스틱 컵의 시장 가격은 개당 50~100원 수준이며, 프랜차이즈 본사가 가맹점에 공급하는 가격은 100~200원 선이다.

소비자는 이 비용을 체감하지 못한 채 사실상 ‘공짜 용기’를 쓰고 버리는 구조에 익숙해졌다. 정부는 이 구조 자체가 일회용품 남용을 고착화했다고 보고 있다.

환경 정책 전문가들은 이번 유상화 조치가 규제보다는 행태 변화 유도 정책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가격을 통해 “선택의 비용”을 드러내겠다는 것이다.

일회용품 규제 강화를 촉구하는 시민단체 회원들


보증금제의 그림자…“왜 실패했고, 무엇이 다른가”

이번 대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 정책 실패를 짚지 않을 수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회용 컵 보증금제다.

이 제도는 일회용 컵에 300원의 보증금을 부과하고, 컵을 반납하면 환급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2022년 전국 시행을 목표로 했으나, 소상공인 부담과 회수 시스템 미비를 이유로 세종·제주로 축소됐고, 이후 사실상 전국 확대가 중단됐다.

제주에서는 컵 회수율 상승이라는 성과가 있었지만, 전체 사용량 감소 효과는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컵을 돌려받는 구조가 “일회용 사용을 정당화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기후부는 이번 대책에서 보증금제를 유지하는 지역에는 컵 유상화 조치를 적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는 정책 중복과 현장 혼선을 줄이기 위한 선택이지만, 동시에 지역별 규제 격차라는 새로운 형평성 논란을 낳을 가능성도 있다.

생산자 책임 강화…EPR 확대의 의미와 부담

이번 대책의 또 다른 축은 생산자책임재활용제(EPR) 확대다. 플라스틱 일회용 컵을 EPR 대상에 포함해, 컵을 생산·수입·판매하는 식음료 프랜차이즈와 제조사가 일정량을 수거·재활용하도록 의무를 부과할 계획이다.

이는 책임의 무게중심을 소비자에서 기업으로 옮기는 조치로 해석된다. 다만 업계에서는 “대형 프랜차이즈와 중소 브랜드 간 부담 격차가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특히 매장 수는 적지만 테이크아웃 비중이 높은 소규모 브랜드의 경우, 재활용 의무 이행이 새로운 비용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정부는 카페 등에서 플라스틱 일회용컵을 돈 내고 사게 바꾼다. AI 생성 이미지


종이컵·빨대까지…‘대체재 신화’의 종언

이번 대책은 플라스틱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부는 종이컵과 빨대 역시 ‘대체재’가 아닌 규제 대상으로 재정의했다.

종이컵은 카페·제과점 등 휴게음식점 가운데 규모가 큰 매장에서 사용하는 대용량 컵부터 매장 내 사용을 단계적으로 금지한다. 이는 2023년 총선을 앞두고 철회됐던 종이컵 규제가 2년여 만에 되살아나는 것이다.

빨대의 경우 재질과 관계없이 ‘요청 시 제공’ 원칙을 도입한다. 플라스틱 빨대는 물론 종이·대나무 빨대도 매장에 비치할 수 없으며, 직원에게 요청해야만 제공된다. 이는 무기한 계도기간으로 사실상 사문화됐던 기존 규제의 한계를 인정한 조치다.

환경단체들은 “대체재를 무제한 허용하는 정책은 결국 또 다른 쓰레기를 낳는다”며 환영 입장을 보이지만, 일각에서는 소비자 불편과 현장 단속의 실효성을 우려한다.

한국형 에코디자인…‘사후 처리’에서 ‘사전 설계’로

기후부는 이번 종합대책에 ‘한국형 에코디자인’ 도입도 포함시켰다.

이는 제품의 제조·유통·사용·폐기 전 과정에서 환경 영향을 최소화하도록 설계 단계부터 기준을 적용하는 제도다.

그동안 국내 자원순환 정책이 폐기물 처리와 재활용에 집중돼 있었다면, 이번에는 “애초에 덜 버리게 만드는 구조”로의 전환을 시도하는 셈이다. 다만 산업계의 수용성과 법적 강제력 확보가 향후 관건이 될 전망이다.

반복될 것인가, 전환점이 될 것인가

탈플라스틱 정책은 늘 사회적 갈등을 동반해왔다. 규제는 완화됐다가 강화되기를 반복했고, 그 사이 정책 신뢰도는 낮아졌다. 이번 대책 역시 소상공인 부담, 소비자 반발, 단속 실효성이라는 고질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조치는 분명한 질문을 던진다. “일회용품을 계속 공짜로 쓰는 사회가 지속가능한가”라는 질문이다.

23일 공개될 탈플라스틱 종합대책 초안과 이후 공청회 과정은, 이 질문에 대한 정부와 사회의 답변을 가늠하는 시험지가 될 것이다. 이번에는 정말로, ‘공짜 컵의 시대’가 끝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