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D 이호영 소장은 "기후위기가 조경 설계의 언어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강조했다.


기후의 언어로 도시를 다시 쓴다.

도시는 더 이상 콘크리트가 그려낸 경계의 집합이 아니다. 해마다 뜨거워지는 공기, 예고 없이 쏟아지는 비, 사라지는 생물들의 흔적은 우리가 익숙했던 도시의 질서를 매 순간 흔들어 놓는다.

이 변화의 중심에서 조경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서 질문을 던진다. “자연은 어디에서 시작하며, 도시는 어디까지 물러나야 하는가.”

조경설계기업 HLD의 이호영 소장은 이러한 질문을 단지 미적 감각의 차원이 아니라, 도시의 생태적 생존 전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 11월 28일 서울 상일동 (주)한국종합기술 대회의실에서 열린 ‘조경설계 최신 트렌드-기후적응과 정원의 시대'란 제목의 강의에서 그는 조경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도시를 다시 쓰게 될지 깊이 있는 견해를 밝혔다. 이날 강의는 한국종합기술 조경부 창립 40주년을 기념한 4주차 강의로 가천대 조경학부 학생 등 80여명의 업계 관계자들이 참석해 경청했다.

28일 서울 상일동 (주)한국종합기술 대회의실에서 이호영 소장은 ‘조경설계 최신 트렌드-기후적응과 정원의 시대'란 제목으로 강의하고 있다.


“기후위기는 이제 조경설계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 소장은 강연의 첫 포문을 이렇게 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도시를 중심에 두고 자연을 그 틀 안에 넣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자연이 먼저이고, 도시는 그 안에서 공존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는 기후위기가 조경 설계의 언어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설명했다. 예전에는 공원·녹지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공간으로 이해되었지만 이제는 ‘기후 적응의 필수 인프라’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시는 점점 뜨거워지고, 물은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입니다. 이런 시대에 조경은 더 이상 미학적 장식이 아닙니다. 생태를 기반으로 도시의 회복력을 설계하는 일, 그게 바로 조경의 역할입니다.”

이 소장은 국가도시공원, 난대수목원, 조경기반 정원도시 프로젝트 등을 예로 들며, '기후 적응형 설계'가 기준이 되어가고 있음을 강조했다.

“낙동강 국가도시공원만 해도 인간 활동 면적을 과감히 줄여 생물 서식 구조를 최우선으로 재편했습니다. 앞으로 조경이 살아남으려면 생태 데이터 기반 설계는 기본이 될 겁니다.”

이날 강의에는 가천대 조경학부 학생 등 80여명의 업계 관계자들이 참석해 활발한 질의응답을 벌였다.


“정원은 더 이상 취미 공간이 아니라 도시의 세계관이다”

이 소장은 최근 여러 프로젝트에서 ‘정원’이 중요한 역할로 부상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정원은 자연을 인간의 시각에서 섬세하게 해석한 공간이죠. 그런데 요즘은 이 정원이 도시의 세계관을 규정하는 장치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더현대 부산'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쇼핑몰과 공원의 관계를 새롭게 해석했다.

“쇼핑몰은 공원과 경쟁합니다. 사람들이 주말에 어디를 갈까 고민할 때, 공원과 쇼핑몰이 경쟁하는 거죠. 그래서 쇼핑몰은 이제 단순한 상업시설이 아니라 ‘머물고 싶은 공원 같은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외부 공간의 미기후 분석, 그늘 구조 설계, 수경 시스템 등을 활용해 ‘환경 체류형 쇼핑몰’을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업체 간판보다 나무가 우선할 수 있는 공간설계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업 캠퍼스 프로젝트에서도 정원의 의미는 확장된다. 게임사인 크래프톤 본사 조성 과정에서 그는 “가짜 자연이 아닌, 생태적 흐름이 실제로 작동하는 정원을 만들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회사의 세계관이 게임 속 가상 세계라면, 현실의 세계관은 정원이 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움직이고 순환하는 자연, 그 자체가 공간의 가장 큰 메시지가 됩니다.”

나무 한 그루 없었던 삭막한 서울 금천구 현대아울렛 사거리. HLD 제공

이 소장의 조경설계로 자연이 되살아난 서울 금천구 현대아울렛 사거리. HLD 제공


“서울의 녹지는 연결되어야 한다—대형 공원이 아니라 네트워크다”

이 소장이 참여한 서울시의 ‘녹지생태도시 마스터플랜’과 ‘초록길’ 프로젝트는 도시계획의 중요한 변화를 상징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도시 안에서 큰 공원을 새로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작은 녹지를 연결해 하나의 생태 네트워크로 만드는 방식입니다.”

서울 4대문 안 공개공지 가이드라인도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한다.

“개방형 녹지는 더 이상 건물 뒤편에 숨겨둘 수 없습니다. 시민이 접근할 수 있는 전면부에 배치하고, 최소 50%를 개방해야 합니다. 이것은 의무가 아니라 도시가 살아남기 위한 조건입니다.”

그는 뉴욕 POPS(개인소유의 공공공간)보다도 더 엄격한 기준을 서울이 적용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이러한 정책이 민간 개발의 질을 높이고 도시 전체의 생태 연결성을 강화하는 핵심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공간은 결국 연결될 때 가치가 극대화됩니다. 서울은 대형 공원보다 도시 전체가 공원이 되는 구조로 가야 합니다.”

이 소장이 VR 헤드셋을 들고 나와 VR 프레젠테이션 장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기술은 도구일 뿐이지만, 설계의 정확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AI·드론·라이다·VR 등 디지털 기술은 조경 설계의 방식 자체를 재편하고 있다. 이 소장은 기술의 도입을 단순한 ‘표현력 강화’가 아닌 ‘설계 체계의 전환’으로 설명했다.

“이제는 현장에 사람이 열 번 가는 것보다 드론 한 번이 더 정확합니다. 라이다 스캔으로 지형을 1cm 단위로 파악하면 현장에서 생길 수 있는 오류를 거의 제거할 수 있죠.”

또한 그는 3D 모델링과 파라메트릭 도구가 조경의 새로운 표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소장이 PT화면을 통해 보여준 3D 기반 설계 모형들.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은 더 빠르고 더 정확한 결정입니다. 3D 기반 설계는 수십 가지 안을 동시에 만들고 비교할 수 있게 해주죠. 예전보다 설계의 밀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VR 프레젠테이션 기술에 대해서도 그는 직접 경험을 소개했다. “특히 옥상정원 설계에서 VR은 혁명적입니다. 실제 좌표 기반으로 촬영해 VR로 보여주면 클라이언트가 ‘아, 여기서 한강이 이렇게 보이겠구나’를 즉시 이해합니다. 그 한 번의 장면이 설계를 통과시키죠.”

기술이 조경을 대체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대체는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기술은 선택지를 넓혀주고 실수를 줄여주지만, 자연을 해석하고 사람의 감각을 읽어내는 일은 결국 사람이 해야 합니다.”

이 소장은 기후위기 시대에 “조경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도시의 생존을 결정하는 전면의 기술”이라고 강조했다.


“조경은 기후·생태·기술의 교차점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강연의 말미에서 이 소장은 조경의 미래를 이렇게 정리했다.

“우리가 만드는 공간은 기후를 견디는 생태적 구조물입니다. 기술은 그것을 더 정밀하게 만드는 도구일 뿐이죠.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연과 도시의 새로운 관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입니다.”

그는 조경이 도시 정책과 산업 구조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흐름을 강조하며 “조경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도시의 생존을 결정하는 전면의 기술”이라고 말했다.

이날 강연은 조경이 맞이한 전환의 폭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도시의 생태적 회복력, 정원의 확장된 역할, 기술 기반의 정밀 설계 등은 조경이 앞으로 다뤄야 할 거대한 과제이자 기회다. 이소장의 말처럼 조경은 지금, 기후와 도시와 기술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