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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종묘 전경.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제공

"종묘는 유교 왕실 사당의 탁월한 사례로 16세기 이후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으며, 전통적인 제례와 형태라는 무형유산의 중요한 요소가 지속되고 있다."

종묘(宗廟)는 조선 왕조의 건국 이념과 정신을 잘 드러내는 공간 중 하나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대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왕실 사당으로 가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로 꼽힌다.

세계 내로라하는 건축가들이 '동양의 파르테논'이라고 칭할 만큼 건축사적 가치도 높아 1995년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과 함께 한국의 첫 세계유산에 올랐다.

스페인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설계한 '건축계 거장' 프랭크 게리가 찬사를 보내며 방한 당시 종묘를 단독 관람하게 해달라고 요청한 일화는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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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정전 월랑.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문화계에서 종묘 주변의 고층 개발 사업을 우려해온 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소중한 유산이 자칫 그 가치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걱정에서다.

도심 개발을 둘러싼 우려는 세계유산 등재 당시에도 거론된 바 있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에 따르면 종묘는 세계유산으로서의 완전성과 진정성을 평가받을 당시 "고층 건물을 건설할 경우, 종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부분이 지적된 바 있다.

이에 국가유산청 안팎에서는 종묘 맞은편에 있는 재개발 사업지인 세운4구역에 서울시가 고시한 대로 최고 높이 142m의 건물이 들어서면 세계유산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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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4구역 위치. 서울시 제공

실제로 문화재위원회(현재 문화유산위원회) 심의에서는 종묘 정전의 상월대에서 바라볼 때 맞은편 건물이 드러나면 종묘의 역사문화환경을 저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 여러 차례 제기됐다.

국가유산청과 학계에서는 이른바 '종묘 뷰' 건물이 '제2의 왕릉뷰' 사태로 번지는 게 아닌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2009년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 40기 중 하나인 김포 장릉(章陵)은 풍수지리상 중요한 계양산을 가리는 대규모 고층 아파트가 잇달아 들어서면서 논란이 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이른바 '왕릉 뷰 아파트'가 세계유산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식 문서로 우려를 표명했고, 올해 3월 전문가 공동 실사에 나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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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장릉 앞 아파트 논란(CG).

조선왕릉의 보존 상태는 올해 세계유산위원회에 이어 2027년에도 보고서를 검토받아야 한다. 보존을 둘러싼 문제가 일단 거론되면 수년간 '주의' 대상이 되는 셈이다.

세계유산 분야를 연구하는 한 대학 교수는 최근 유네스코가 유산 보존·관리에 특히 신경 쓰고 있다며 "(종묘 주변의) 고층 개발로 인해 자칫 '위험에 처한 유산'에 오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서울시는 역사문화환경 보존지역 기준인 100m 밖에 있어 규제 대상이 아니라고 하지만, 유네스코는 인근 지역에서도 폭넓게 세계유산영향평가를 받도록 (권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세계유산 분야 전문가 역시 "세운4구역의 높이 계획이 (최고 높이 약 142m 기준) 그대로 진행되면 유네스코가 개입할 여지가 충분하다"며 대응책 마련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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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종묘 정전.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제공

국가유산청과 서울시의 '엇박자'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세운4구역의 높이 계획은 2018년 문화재청(현재 국가유산청) 심의를 거쳐 종로변 55m, 청계천변 71.9m로 정해졌으나, 이후 사업이 장기 지연된 상태다.

국가유산청은 기존에 협의된 높이를 유지하고 세계유산영향평가를 이행해야 한다는 입장이나, 서울시는 현행 법령을 근거로 높이를 규제할 대상이 아니라며 맞서고 있다.

양측은 작년부터 협의에 나섰으나 결론에 이르지 못했고, 서울시는 최근 시보를 통해 '세운재정비촉진지구 및 4구역 재정비촉진계획 결정(변경) 및 지형도면'을 고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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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영녕전.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제공

서울시 측은 "국가유산청과 4구역 높이 완화에 대해 여러 차례 협의하고 타협점을 찾아 줄 것을 건의했으나, 기존에 협의된 높이를 유지할 것과 세계유산영향평가 이행을 권고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종묘의 국제적 위상 강화, 종묘에서 남산으로 이어지는 남북 녹지 축 및 녹지생태 도심 실현을 위해서는 높이 계획을 조정하는 것이 적정하다"는 뜻을 밝혔다.

국가유산청은 서울시 고시 내용을 토대로 다양한 대응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건축을 전공한 한 교수는 "세운4구역 높이 문제는 오랫동안 논의가 이어져 온 사안"이라며 "한쪽이 밀어붙이거나 강력히 대응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다시 협의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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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외대문.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제공

세계유산 등재 30년을 맞은 상황에서 종묘는 잇달아 논란의 중심이 되는 모양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지난해 9월 외국인을 비롯한 외부인과 함께 이른바 '차담회'를 열었다는 의혹이 불거진 곳도 바로 종묘다.

당시 김 여사 일행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인 신실까지 열어 둘러봤으며, 망묘루에서 비공개로 '차담회'를 한 사실이 알려졌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김 여사가 종묘를 '사유화'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랐고, 김 여사와 관련한 의혹을 수사하는 민중기 특별검사팀에서 수사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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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세운4구역 재개발 공사현장. 종로3와 종로 4가 사이 종묘 맞은편 지역이다.